서울 숙명여고 시험문제가 유출된 정황과 물증이 확인되면서 고등학교 내신에 대한 신뢰문제가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현재 수시 비중이 80% 안팎인 대학입시에서 내신의 중요성은 학생부와 함께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단 1점에도 학생과 학부모는 예민해질 수밖에 없고 그런 만큼 시험은 더욱 공정하게 치러져야 한다. 하지만 시험지 유출 등 내신비리가 반복되면서 “숙명여고서 드러난 것은 빙산의 일각”이라는 불만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교육단체들은 “교육부가 전국 모든 고등학교에 대한 전수조사를 즉각 실시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이참에 학생부종합전형을 줄이고 수능위주 전형을 대폭 확대하자는 주장도 확산되고 있다. 학생과 학부모 등 교육 당사자들의 내신과 학생부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면서 교육계 전체가 ‘신뢰의 위기’로 빠져드는 상황이다.
■“내신비리 숙명여고만의 문제인가” 분통 터트리는 학부모들
“우리 선생님도 혹시 하는 마음이 생긴다. 원래 믿고 따르던 선생님들까지 의심하게 될 수 있는 상황이 왔다는 게 안타깝다”
숙명여고 학생들은 이번 내신비리에 대한 불안감과 슬픔을 동시에 토로하고 있다. 이른바 ‘강남 8학군 명문고’로 알려진 숙명여고에서 내신비리가 드러나자 학생과 학부모들의 충격은 더욱 큰 것으로 보인다. 높은 교육열과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는 만큼 엄격한 내신관리가 있을 것으로 믿은 학생·학부모와 교육단체들은 뒤통수를 맞은 격이 됐고 전체 고등학교로 불신이 확산되고 있다.
내신시험 문제유출 사건은 이번 숙명여고가 처음이 아니다. 올해 적발된 것만도 광주 등 3건이고 2014년 이후 13건에 이른다. 지난 7월 서울 강남구 한 중학교에서는 교사가 기말고사를 앞두고 일부 학생들에게 수학시험 문제를 미리 알려줘 문제가 됐다. 지난해 11월 서울 한 외국어고에서는 교사가 인근 학원 원장과 공모해 시험문제를 유출했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대입 수시전형에서 교내 수상 실적만을 반영하게 한 뒤부터 고등학교들의 중복·부정 시상 문제도 끊이지 않고 있다. 한 조사에서는 대입 실적을 위해 특정 학생에게 상을 몰아주는 등 중복 시상이 전국 고등학교 197곳에서 공공연히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심지어 학생부의 부당한 수정과 조작으로 징계 받은 사립고등학교 교사의 숫자도 증가하고 있다. 최근 5년간 총 22건의 징계요구가 있었고 이중 15건이 고등학교에서 발생한 사안이었다. 연도별로는 2014년 2건, 2015년 2건, 2016년 4건, 2017년 5건, 2018년 2건 등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나는 추이를 보였다. 교육부 조사에서는 자녀 여부와 상관없이 미성년자들이 논문 저자로 등재된 사례가 최근 10년간 591건이나 된 것으로 파악됐다. 자신의 자녀를 논문 저자로 올린 139건 외에 452건이 추가 파악된 것이다. 교수 사회는 기여도가 없는 동료 교수의 자녀를 자신의 논문에 저자로 올리는 ‘품앗이 등재’ 사례가 적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고등학교 학생부 정정 건수도 2012년 5만 6,678건에서 2017년 18만 2,405건으로 5년 새 3배 이상 늘기도 했다.
■“학교보다 학원성적 더 신뢰… 공교육 시스템 뿌리째 흔들린다”
숙명여고 사태 논란과 관련 정부가 잇따른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신뢰성을 회복하기엔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시험출제·관리절차를 규정한 학업성적관리지침을 강화하고 시험지 인쇄실 등에 CCTV를 설치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교사와 자녀가 한 학교에 다니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상피제’를 도입하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이런 규제와 감시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우려의 목소리만 커지고 있다. 공정사회국민모임은 “내신비리는 수시라는 대입제도의 구조적인 문제에 기인 한다”며 “교사 개인의 일탈로 간주하고 그때마다 사람만 처벌해서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대학입시제도 개혁을 위해 △수시비리 전수조사 △수시비율 20%이하 축소 △정시비율 80%이상 확대 △내신시험 전국단위 시험으로 전환 및 국가관리 △학생부종합전형 폐지 등을 주장했다.
이번 숙명여고 사태에서 내신 성적과 학원 성적의 불일치가 시험문제 유출의혹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했다. 내신 1등 학생이 어떻게 학원시험서 낮은 성적을 받은 수 있느냐는 의혹을 산 것이다. 교사들은 “학교 성적보다 학원 성적이 더 신뢰받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한마디가 현재의 공교육 시스템에 대한 불신을 그대로 대변해주고 있다고 본다. 최근 채용비리·고용세습 논란으로 불공정사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며 “최고의 스펙은 연줄”이라는 한탄이 만연하고 있는 상황이다. 공교육과 대입까지 ‘연줄’이라는 말이 나와서야 되겠는가. CCTV설치·상피제 도입 등은 미봉책에 불과하다. 정부 당국은 공교육의 공정성 확보를 주장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고교내신평가와 대입제도의 개선과 무너진 공교육 신뢰성의 회복에 힘써야 할 때다. /이정법기자 gble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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