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부터 고조되기 시작한 아일랜드인들의 저항은 마침내 1919년 4월 신페인당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무장봉기로까지 이어졌다. 1919년 1월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을 결성한 신페인당은 독립을 선언했지만 영국이 이를 인정하지 않자 무력투쟁에 나섰다. 가장 심했던 유혈 사태는 1972년 1월30일 발생한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이다. 영국의 의회 해산 등으로 격앙된 IRA는 신교계 얼스터 의용군과 격렬한 총격전을 벌였다. 한 해 동안 사망자가 무려 468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끊이지 않던 유혈 사태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것은 1990년대다. 1993년부터 지루한 협상을 거쳐 영국과 북아일랜드는 1998년 4월10일 ‘굿프라이데이협정’에 서명했다. 이를 통해 북아일랜드는 경찰·사법권을 제외한 기본적인 자치권을 부여받았다.
한동안 잠잠했던 북아일랜드 문제가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Brexit) 협상을 계기로 다시 부각되고 있다. 브렉시트 이후 유럽연합(EU) 회원국으로 남는 아일랜드와 영국령인 북아일랜드 간의 이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쟁점이다. EU는 브렉시트 이후에도 북아일랜드를 EU 관세동맹 아래에 두고 아일랜드와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영국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 문제가 잘못 다뤄지면 북아일랜드 내 신구교도 간의 해묵은 갈등을 들쑤실 가능성도 있다. 영국과 EU가 북아일랜드의 뇌관을 터뜨리지 않고 브렉시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오철수 논설실장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