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의 7박 9일간 유럽 순방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이다. 청와대는 “유럽 순방으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대한 폭넓은 지지를 확보했고 로마 교황의 방북도 성사시켰다”고 자화자찬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대통령의 대북제재 완화 요청은 공감대를 얻지 못했고 오히려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핵 폐기(CVID)’ 때까지 대북제재가 유지돼야 한다고 결의했다”고 엇박자 행보를 지적하며 외교실패라고 비판한다. 또한 아시아·유럽 정상회의(ASEM) 51개 회원국과 프랑스·영국·이탈리아 등이 핵뿐 아니라 대량살상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에도 CVID를 적용해야 한다는 점을 명시해 정부의 대북지원과 대북제재 완화의 정당성이 정면으로 부정된 외교참사라는 평가도 있다. 물론 정부는 제재 완화의 전제로 ‘비핵화가 돌이킬 수 없는 정도가 됐을 때’라는 조건을 달고 주요 정상들을 설득했지만 오히려 진정성만 의심받았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이번 유럽 순방길에서 한국과 국제사회는 북한 비핵화를 위한 접근방식에서 극명한 인식의 차이를 확인했다. 이런 인식차이의 근원은 한국이 민족공조에 기반을 둔 해법을 선호한다면 국제사회는 튼튼한 국제공조가 해법의 중심이라는 점이다. 2018년 북한 신년사의 핵심은 ‘핵 있는 상태에서의 민족공조’다. 신년사를 대하는 입장도 이와 별반 차이가 없다. 우리 정부는 ‘민족공조’의 틀을 유지해 남북관계 발전의 속도를 내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반면 국제사회는 ‘대북제재의 틀’ 속에서 ‘핵 있는 북한’을 ‘핵 없는 북한’으로 전환시키는 데 노력하고 있다. 문제는 북한 신년사에 대해 서로 다른 곳에 방점을 두면서 불협화음이 자주 발생했고 불협화음이 북핵 폐기의 가능성을 점점 희박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번 ASEM의 공동성명을 보면 국제사회는 북핵에 대해 두 가지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북핵 폐기의 핵심은 CVID이며 CVID를 위해 대북제재가 지속돼야 한다는 점이다. CVID는 핵무기가 반출되고 우라늄 농축시설이 해체된 단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핵 관련 시설과 장비 신고에 이어 철저한 검증 단계를 거쳐야 한다. 그러나 북한은 ‘1년 이내 비핵화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임기 내(2021.1) 비핵화’로 국제사회를 우롱하면서 신고와 검증을 거부하고 있다. 이번 공동성명은 말의 성찬만 난무한 상황에서 실질적 행동이 없는 북한에 보내는 경고다.
또한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는 인내의 한계를 넘어선 북핵 위협에 대한 불가피한 조치이며 북한이 CVID에 동참하도록 하는 평화적 수단이라는 점을 재확인했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서두르지 말라. 잘될 것’이라는 긴 호흡의 방향 전환은 대북제재의 효과에 대한 강한 믿음이 뒷받침하고 있다. 반면 2018년 북한이 유화 노선으로 선회한 것은 대북제재에 따른 피해 때문이다. 북한이 유엔총회에서 “인민의 존재와 개발 권리가 심각하게 제한받고 있다”고 한 호소는 제재가 유효하다는 사실을 대변해준다. 이는 대북지원이나 대북제재 완화가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남북관계 발전이야말로 한반도 비핵화를 촉진하는 동력”이라고 언급했다. 이는 민족공조에 기반한 ‘경제·안보 교환 모델’이다. 이 모델은 감성적 민족공조가 오히려 ‘핵 있는 북한’을 더욱 공고하게 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외면했다. 그리고 이 모델은 동일한 가치를 공유할 때만 유효하다는 점도 고려하지 않았다. 또 우리 스스로 대북제재의 구조적 허점(structural hole)을 키운다는 점도 무시했다. 특히 민족공조는 ‘우리의 선의에 북한도 반드시 선의로 행동할 것’이라는 치명적 착각에 빠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을 간과했다. 끝으로 대북제재가 북핵 폐기를 위한 유일한 평화적 수단이라는 점도 무시됐다. 따라서 민족공조에 의한 북핵 폐기가 아니라 대북제재에 의한 북핵 폐기로의 선회가 절실하다. 그래야 ‘핵 없는 민족공조’로 한반도의 건강한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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