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아림(23·SBI저축은행)은 크게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얘기했다. 마지막 18번홀(파4)에서 괴물 같은 드라이버 티샷을 치고 난 뒤다.
25일 제주 서귀포의 핀크스 골프클럽(파72·6,643야드)에서 열린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SK네트웍스·서울경제 레이디스 클래식(총상금 8억원·우승상금 1억6,000만원) 1라운드. 김아림은 18번홀에서 마음먹고 드라이버 샷을 날렸다. 다소 오른쪽으로 치우쳐 벙커에 빠지거나 물로 들어갈 것 같던 타구는 그러나 벙커를 훌쩍 넘긴 러프에 멀쩡히 살아 있었다. 현장의 갤러리와 관계자, 중계진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든 차원이 다른 장타였다. 100야드 남짓한 지점에서의 두 번째 샷을 핀에 가깝게 잘 붙였으나 퍼트가 어긋나 파에 그쳤지만 김아림은 시즌 2승이자 데뷔 2승째를 향해 힘찬 시동을 걸었다.
경기 이후 김아림은 18번홀 상황에 대해 “오른쪽을 보고 드로(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휘어지는 구질)를 걸었는데 드로가 조금 덜 걸렸다. 볼이 멈춘 지점은 아마 273야드쯤 됐던 것 같다”고 덤덤하게 말했다. 러프가 아니라 페어웨이였다면 훨씬 더 굴러갔을 것이다.
드라이버 샷 평균 258야드로 압도적 1위를 달리는 데뷔 3년 차 김아림은 이날 15~17번 세 홀 연속 버디를 포함해 버디 6개와 보기 1개로 5언더파 67타를 쳤다. 아직 우승이 없는 상금랭킹 37위의 2년 차 김수지(22·올포유)와 공동 선두다. 김수지는 버디만 5개를 챙겼다. 지난달 23일 박세리 인비테이셔널에서 첫 우승을 신고했던 상금 6위(약 5억7,100만원) 김아림은 한 달 만에 시즌 2승 기회를 잡았다.
김아림은 대다수 선수가 지치게 마련인 여름에 클럽 강도를 더 높여 남성용 스펙에 맞출 정도로 시즌 전 체력 훈련의 완성도가 높았다. 덕분에 후반기에 첫 승이 터졌고 시즌 막바지 대회인 서울경제 클래식에서 다시 우승 기회를 얻었다. 총상금 8억원 이상의 ‘빅팟(big pot)’ 대회는 이번이 올 시즌 마지막이다. 김아림은 “바람이 많지 않고 짧은 퍼트가 잘 들어가서 좋은 스코어가 나왔다”며 “시즌 막바지인데 내년에는 완성된 김아림의 골프를 보여드리겠다”고 했다.
총상금을 2억원 증액하고 4라운드 대회로 규모가 커진 무대에서 선수들은 1타라도 더 줄여놓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날 코스가 라운드에 가장 이상적인 환경으로 선수들을 맞았기 때문이다. 낮 기온 20도의 따뜻한 날씨에 바람은 초속 2m 수준에 머물렀다. 26일 2라운드 때는 오후 들어 바람이 다소 강해진다는 예보가 있다. 핀크스GC는 바람의 세기에 따라 완전히 다른 골프장으로 얼굴을 바꾸는 곳이다.
갤러리들이 가장 많이 몰린 곳은 김아림-배선우(24·삼천리)-이소영(21·롯데) 조와 최혜진(19·롯데)-오지현(22·KB금융그룹)-김혜선(21·골든블루) 조였다. 약 9억5,300만원으로 상금 1위를 달리는 지난해 이 대회 준우승자 이정은(22·대방건설)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퀄리파잉(Q) 시리즈 참가로 자리를 비운 상황. 상금 3·4위인 최혜진(약 8억100만원)과 배선우(약 8억원)는 이번 대회 우승상금 1억6,000만원을 챙기면 단숨에 1위로 나설 수 있다. 상금 5위 이소영(약 7억1,500만원) 또한 이번주 우승하면 최종전에서 역전 상금왕을 노려볼 수 있다.
첫날 승부에서는 배선우가 한발 앞서나갔다. 시즌 2승, 통산 4승의 배선우는 장기인 날카로운 아이언 샷을 앞세워 버디 4개와 보기 3개로 1언더파 71타를 쳤다. 공동 18위. 선두와 4타 차에 사흘이나 남았으니 역전 우승을 기대하기에 무리가 아닌 위치다.
시즌 첫 이글로 짜릿한 손맛을 본 최혜진은 이븐파 공동 26위로 마쳤다. 1오버파로 답답한 흐름을 끊지 못하던 그는 8번홀(파4)에서 두 번 만에 홀아웃했다. 120m 남짓한 거리에서 친 두 번째 샷이 핀 앞에 떨어져 속도가 적당하게 줄어든 뒤 홀 속으로 숨은 것. 완벽한 샷 이글에 최혜진은 캐디인 아버지와 손뼉을 마주치며 활짝 웃었다. 시즌 2승으로 이미 신인상 수상을 확정한 ‘슈퍼루키’ 최혜진은 올해의 선수상인 대상(MVP) 포인트 1위를 달리고 있다. 이번주 우승하면 무조건 대상을 확정하며 신인상 포함, 최소 2관왕을 확보한다. 이 경우 상금왕에 다승왕 가능성까지 커져 4관왕이나 그 이상도 노려볼 수 있다. 15번홀(파4)에서 그린 주변 어프로치 샷 실수로 보기를 범한 최혜진은 17번홀(파3)에서는 16m의 먼 거리 버디 퍼트를 넣어 분위기를 바꿨다. 이글 1개와 버디 2개에 보기 4개. 직전 대회부터 샷 난조에 시달리던 오지현은 더블 보기 1개와 보기 4개 등으로 3오버파 공동 66위로 밀려난 뒤 손목 통증을 호소하며 기권했다. 디펜딩 챔피언 김혜선은 최혜진과 같은 이븐파 공동 26위다.
지난해보다 길어진 코스와 잘 구르지 않는 페어웨이에 거리 부담이 커진 선수들은 그린에서도 진땀을 뺐다. 스팀프미터(막대 모양 도구를 이용해 볼이 굴러가는 거리를 측정) 3.5m의 미국프로골프(PGA) 투어급 유리판 그린과 ‘한라산 브레이크’로 흔히 부르는 착시현상까지 겹쳐 애를 먹었다. 퍼트 때 거리감과 방향을 착각하기 쉬워 짧은 퍼트에도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지난해 2라운드까지 선두의 스코어가 14언더파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한층 높아진 난도를 확인할 수 있다. /서귀포=양준호기자 miguel@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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