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적인 소식일수록 더 오래 기억된다. 소나 말의 가죽에 한 번 찍힌 낙인이 지워지지 않는 것처럼 부정적인 기억의 생명력은 사실이 아니라도 질기다. 억울하게 죄인으로 취급된 당사자가 부정적으로 변해가는 경우도 많다. 사회병리학에서는 이를 ‘낙인효과(Social Stigma)’라고 부른다. 누가 함부로 낙인을 찍을까. 주로 언론과 검찰 등이 그런 짓거리를 한다. 청소년 사회에서도 비슷하다. 급우를 ‘왕따’로 낙인 찍는 아이들은 ‘일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참여정부 시절 정부의 대폭 개각 기사가 실린 신문 가판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새롭다. 경제부총리로 임명된 장관의 프로필에 대인관계가 좋다면서도 ‘책을 읽지 않는 게 흠’이라는 소제목까지 붙였다. 신임 각료나 기관장 소개 기사는 장점을 드러내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불문율이지만 해당 보수매체는 노무현 정권이 싫었는지 다른 장관 후보자들에게도 악평을 퍼부었다. 15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지금은 여당 중진 의원으로 활동하는 당시 신임 경제부총리는 요즘도 오랜만에 만나는 지인들에게 ‘왜 책을 읽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는단다.
낙인효과란 이토록 오래가고 무섭다. 미필적 고의든 실수든 악의를 담았든 잘못된 기사를 뿌리는 언론에 대한 응징 수단이 없지는 않다. 보지 않으면 그뿐이다. 언론사는 기본적으로 민간기업이기에 시장에서 심판받아 마땅하다. 작심하고 지속적으로 왜곡기사를 쓰는 기자나 신문·방송이라면 독자와 시청자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것이 언론의 공공성 강화 측면에서도 바람직하다.
문제는 낙인을 찍는 주체가 책임의식을 망각한 언론이나 철부지 일진 청소년이 아니라 정부인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방위산업 비리를 수사한 검찰의 잣대가 얼마나 엉터리였는지 지난 2015년 합동수사단 고위 관계자와의 통화록을 옮겨본다. “비리금액을 9,809억원이라고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했는데 횡령액 기준인가./아니다, 관련 사업비가 그렇다는 것이다./그렇다면 예산 10조원으로 고속철을 건설한다고 치자. 1조원 규모의 공사구간 낙찰 과정에서 공무원이 뇌물 10억원을 받았다면 비리 규모는 10억원인가, 1조원인가./1조원이다.”
비리가 있으면 받아 내는 것이 선의의 관리자인 정부의 의무다. 비리 규모가 9,809억원이라지만 합수단이 매긴 구상액은 30억원 수준에 그쳤다. 결과적으로 검찰은 방산 비리의 규모를 크게 부풀린 셈이다. 아직도 ‘군인들이 무기를 산다며 1조원 가까운 돈을 해 먹었다’고 생각하는 국민이 적지 않다. 합수단(검찰)은 왜 그토록 무리한 수사를 했을까. 박근혜 전 대통령이 ‘방산 비리는 이적 행위’라고 강조한 뒤부터 수사에 탄력이 붙었다. 과잉 충성이 방산 비리를 부풀렸다고 생각하면 과할까.
서울경제신문이 최근 방위사업 기획 시리즈에서 소개하고 국회가 확인한 것처럼 2011년부터 2017년까지 방산 비리로 법정에서 선 34명 가운데 17명이 무죄 판결(2심 기준)을 받았다. 무죄 판결 비율 50%는 일반 형사범의 무죄 비율인 3%보다 훨씬 높다. 절반인 무죄 비율은 더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 25일에는 최윤희 전 합참의장과 정홍용 전 국방과학연구소장 등 4명이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대법의 확정판결은 이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줄까. 낙인효과를 생각하면 쉽지 않아 보인다.
확정판결이 났지만 이번 사건만큼은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형 차기 전투기(KF-X) 사업에서 레이더를 비롯한 4대 핵심기술의 국내 개발이 불가능하다는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보고와 달리 국내 기술 개발이 가능하다고 주장해 관철한 정 전 소장 등이 당시 청와대 비서들의 강권으로 검찰 수사의 도마에 올랐다는 점은 권력의 남용과 횡포 방지라는 차원에서도 되짚어야 할 사안이다. 이날 다른 사안으로 대법원 법정에 선 김모 해군 대령도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생도 시절을 포함해 37년간의 군 생활의 마지막 3년을 범죄자라는 눈총을 받으며 살았다.
검찰뿐 아니라 감사원도 낙인을 찍는 ‘갑 중의 갑’으로 자리 잡았다. 국산 현궁미사일 개발 과정에서 수천만원 규모의 2차 영세 하청업체의 시험용품 재사용 의혹을 감사원이 마치 사업 전체의 비리인 양 몰아붙인 끝에 법정에 선 국방과학연구소(ADD) 연구진도 올여름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통탄할 죽음이 있었다. 체계종합업체의 한 연구원이 “하청업체 관리에 철저하지 못해 ADD 연구진에 폐를 끼쳤다”며 자살한 사건이다.
잇따른 무죄 판결은 우리 사회에 최소한의 윤리와 사법 판단의 객관성이 살아 있다는 방증이어서 반갑다. 결론을 미리 낸 검찰의 과잉 수사나 법원의 판단 착오로 죄인의 멍에를 쓰는 경우가 이제 사라지기를 소망한다. 언론과 검찰·감사원도 반성해야 마땅하다. 최종심에서 무죄가 확정됐지만 수사 착수에서 1심·2심을 거치는 동안 왜곡되고 짓밟힌 개개인의 인권과 명예를 회복시켜주는 데 우리 사회가 관심을 가질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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