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제가 심상치 않다. 미국과 중국 간 무역분쟁이 예상보다 장기화할 것이라는 전망 속에 신흥국의 불안이 선진국까지 확산되며 지난주 각국 증시는 말 그대로 퍼렇게 질렸다. 특히 개방경제이자 중국의 직접 영향권에 있는 한국에서는 외국인 투자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코스피지수는 지난해 말보다 18%나 하락해 2,000선이 위태로울 정도다.
다음 달 말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만나 극적으로 화해하며 미중 갈등이 봉합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다수 전문가들은 갈등이 오래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우리나라 대외경제정책 분야의 최고 싱크탱크인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의 분석도 마찬가지다. 지난 16일 서울경제신문을 찾은 이재영(54·사진) 원장은 “미국은 단순히 대중 무역적자를 줄이려는 게 아니고 근본적으로 중국의 부상을 막겠다는 뜻”이라며 “어느 한쪽이 무릎을 꿇기 어려운 구도여서 장기화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이어 “한국은 미국과 중국(G2)에 대한 수출액이 전체의 37%에 달할 정도로 무역의존도가 높아 수출이 둔화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우리 경제의 앞날에 먹구름이 잔뜩 낀 셈이지만 위기에는 기회도 따르는 법. 이 원장은 “글로벌 시장에서 중국이 한국을 맹추격하는 가운데 이번 갈등이 일종의 ‘브레이크’ 역할을 했다”며 “한국이 한 걸음 더 앞서 갈 시간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의 강력한 경제제재로 중국의 기술개발과 산업혁신이 주춤할 때 격차를 더 벌려야 한다는 뜻이다. /대담=이철균 경제부장 fusioncj@sedaily.com
이 원장은 최근 미국 금리 인상과 미중 간 통상분쟁, 미국 등 주요국 기업의 실적악화 등으로 신흥국 금융불안이 선진국까지 확산되면서 글로벌 금융시장의 변동성이 확대될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특히 금융개방도와 무역의존도가 높은 한국 금융시장이 불안해지고 수출이 둔화를 겪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는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와 4,000억달러 규모의 외환보유액, 양호한 단기외채 비중 등 대외건전성이 과거보다 크게 개선돼 금융위기 재발 가능성은 희박하다”면서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과도한 원화 약세를 막는 안정화 조치와 금융사 리스크 관리 강화, 가계부채 점검 등 대응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글로벌 안전자산 선호현상이 심화하면 원화가치가 급락할 우려가 커진다. 수출기업에는 유리할 수 있지만 수입물가 급등으로 가뜩이나 부진한 내수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 이 원장은 “환율이 급변하면 국내 경제에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며 “미국이 원화 약세를 막는 정부 대응은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만큼 적극적인 환율 안정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통화 안전판 역할을 할 스와프 국가도 넓혀야 한다”며 “특히 영국과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미국 등과 체결할 수 있다면 한국 금융시장이 더욱 안정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외국인 자금 이탈 등으로 국내 시장금리가 상승하면 가계부채 부실화 위험이 더 커질 수 있는 만큼 가계부채 안정화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이 원장은 이번 금융불안의 핵심원인 중 하나로 꼽히는 ‘미중 통상분쟁’이 한국의 수출과 산업생산에 부정적이지만 제한적 영향을 줄 것으로 전망했다. KIEP는 미국의 대중 추가 관세 부과로 한국의 수출액이 7억9,000만~14억1,000만달러 줄고 산업생산은 최소 19억1,700만달러에서 최대 33억9,000만달러 감소한다고 분석했다. 이는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0.13~0.36%를 차지한다. 지난해 한국 수출에서 미국과 중국의 비중이 37%에 달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충격이 심각한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원장은 미중 갈등에서 찾아올 기회에 주목했다. 그는 “미국과 중국이 서로 관세를 부과하면 한국 제품이 양국 수입시장에서 가격경쟁력 등 대체효과를 누리며 부정적 영향을 부분적으로 상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원장은 이어 “한국 주력산업으로서는 그간 가격 매력에 기술력까지 높여온 중국의 추격이 부담스러웠는데 이를 따돌릴 시간을 버는 효과도 있다”고 덧붙였다.
궁극적으로 한국이 새 정부 들어 내놓은 신남방·신북방정책으로 시장을 다변화하는 등 경제영토를 넓혀야 미중 통상분쟁 등 특정국 변수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이 원장은 내다봤다. 그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과 인도가 G2에 버금가는 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다”며 “아세안과 인도 지역 인구는 20억명에 달하고 성장률도 5~7%대로 높아 점차 생산기지에서 소비시장으로서 가치가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신남방·신북방정책은 경제 패러다임을 바꾸는 동시에 한국이 세계 11위 경제대국으로서 큰 틀의 세계전략을 만들어 유라시아를 경영해보겠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지금까지는 시야가 국내로 한정돼 국력을 키우는 데 집중했다면 이제는 세계적 위상에 걸맞게 한 국가를 뛰어넘는 비전을 제시했다는 뜻이다. 그는 “중국은 일대일로(一帶一路·육상 해상 실크로드)를 외치고 미국은 이에 맞서 미군 태평양사령부를 인도태평양사령부로 개편해 아시아 지역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꾀하고 있다”며 “한국 역시 신북방·신남방정책으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연결하고 해양과 대륙을 잇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원장은 같은 맥락에서 북한이 신북방정책의 교두보이자 한반도의 경제성장은 물론 평화를 담보할 수 있는 돌파구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특히 ‘나진·하산 프로젝트(러시아 하산역과 북한 나진항 사이의 철도 개보수 및 항구 현대화 사업)’를 재개하는 등 북한과 러시아·중국 국경이 맞닿은 지역 개발은 21세기 세계 경제를 견인할 ‘뉴딜정책’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는 “이 지역은 자원이 풍부하고 중국 동북3성과도 맞닿아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마지막 남은 개척지”라며 “나진·하산 프로젝트는 러시아에서 자본을 투자한 덕에 유엔 제재 대상이 아니라는 양해를 받아 원칙적으로 재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경협이 본격화하면 가장 먼저 삽을 뜰 지역인 셈이다. 각국으로 철도가 연결돼 교통도 좋고 인구도 많아 수요가 넉넉하다는 것이 이곳의 장점이다.
다만 남북·미북관계가 극적으로 진전돼 개발이 가시화하더라도 한국이 얼마나 주도권을 쥘 수 있을지는 다른 문제다.
이 원장은 “참여정부 시절 개성공단이나 금강산관광처럼 한국이 독점적으로 사업을 맡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북한 지역 개발이 한국에 새로운 경제 번영의 기회가 될 수 있듯이 중국과 러시아는 물론 미국·일본도 이 시장에 눈독을 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대륙의 중간에 있는 몽골까지 북한을 통해 동해로 진출하기를 원하고 북한이 고속철도를 놓는다면 유럽까지 경쟁에 뛰어들 태세다.
이 원장은 “한국은 여전히 이 지역에 대한 조사가 부족한데 갑자기 개발이 시작되면 중국과 러시아가 기존 네트워크와 외교력을 동원해 선점할 가능성이 높다”며 “이후 일본과 미국이 자본을 앞세워 나오면 한국만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이어 “북한 역시 가장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기업과 나라를 사업 파트너로 두고 싶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결국 한민족이라는 안이한 기대로 남북 경제협력을 바라보는 것은 금물이라는 얘기다. 앞으로 다가올 어떤 상황에도 대비해 충분하고 치밀한 전략을 세울 때 남북경협의 과실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만큼 정부와 KIEP를 포함한 국책연구기관의 임무가 막중한 셈이다.
경협도 중요한 과제지만 한반도로서는 무엇보다 평화가 중요하다. 이 때문에 남북교류가 불가역적인 단계까지 이르도록 확장하고 판문점선언의 국회 비준 또한 필요하다는 것이 이 원장의 생각이다. 그는 “백두산과 한라산을 오가고 기업 등 민간교류를 확대해 다시는 단절상태로 되돌아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남북경협에는 정부 재정이 마중물이 돼야 하고 정책의 지속성이 필요하므로 여야가 함께 동의한다는 뜻에서 국회 비준 절차를 거치는 게 바람직해 보인다”고 밝혔다.
/정리=임진혁기자 liberal@sedaily.com 사진=송은석기자
[약력]
△1964년 경남 양산 △한양대 경영학과 △모스크바국립대 경제학 박사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구미유라시아본부장 △한국유라시아학회 회장 △남북정상회담준비위원회 전문가 자문위원 △현 대통령 직속 북방경제협력위원회 민간위원, 한국태평양경제협력위원회(KOPEC) 회장 △현 대외경제정책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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