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공단에서 통근버스를 운전하는 운전수예요. 이름은 최송아, 나이는 스물아홉.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부모님 밑에서 남측기업에서 주는 초코파이를 먹고 자랐어요. 세계 유일의 공산국가에서 자본주의를 맛보고 자란 거죠. 부상 때문에 군 복무를 마치고 개성사범대학에서 연극을 공부하며 인민배우를 꿈꿨죠. 북한에서도 러시아 연극은 접할 수 있었을 테니까 체홉을 공부했고요.”
24일 서울 종로 두산아트센터 지하 연습실. 이경성 극단 크리에이티브 바키 연출의 신작 ‘러브스토리’(내달 6~24일,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 111) 연습이 한창인 가운데 배우 나경민이 책상에서 반쯤 일어나 대사를 읊는다. 나경민을 포함 성수연, 우범진 등 세 명의 배우와 이경성 연출이 공동 창작한 이 작품은 배우들이 직접 개성공단과 그 공간에 얽힌 사람, 역사를 공부하고 사유하고 상상해낸 결과물이다. 지난해 ‘워킹홀리데이’를 통해 분단의 공간인 DMZ를 직접 걷고 사유한 결과물을 연극으로 선보였던 이들은 경계 밖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보기로 했다. 세 배우는 각각 개성공단의 통근 버스 운전기사, 개성공단 안의 한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남측 근로자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북측 노동자, 그리고 배우 자신을 오가며 객석에 말을 건다. 특별한 서사는 없지만 객석의 관객들이 북한 사람을 하나의 집단이 아닌 개별적 존재로 인식하고 소통해보는 기회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작품의 토대를 쌓아올리기 위해 이 연출과 세 명의 배우들은 지난 5월부터 남측의 파견 공무원과 기업 관계자들을 두루 만났고 가볼 수 없는 공간에 간접적으로나마 발을 디뎠다. 물론 한계도 분명했다. 이 연출은 “여러 루트로 수소문했지만 개성공단을 방문해보기는커녕 북측 근로자를 직접 만나볼 수도 없었고 그 공간에서 실제 벌어진 만남과 교감, 관계 형성을 직접 경험해볼 수도 없었다”며 “결국 우리는 북한을 정보로만 접하고 실체적 감각으로 경험할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이 연출과 세 배우가 ‘러브스토리’를 “우리의 편견, 정보적 한계, 바람과 고통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라고 소개하는 이유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의미 있는 것은 경계 너머 공간, 그 공간의 사람들을 ‘지금, 여기, 우리’와 연결하는 계기를 만드는 작은 시도이기 때문이다. 성수연 배우는 “언젠가는 남과 북의 사람들이 섞이게 될 텐데 과연 그때 우리는 서로를 편견 없이 대하고 잘 어우러질 수 있을지 궁금했고 이 공연을 준비하며 그들에 대해 알려는 노력 자체가 한 편의 ‘러브스토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러브스토리’를 통해 분단된 세상의 경계를 넘어선 것처럼 분단과 통일의 공간, 사람을 사유하는 작업들이 연극의 화두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연극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말을 증명하듯 남북 화해 무드 속에 평화의 시대, 남북관계에 대한 고민을 끌어안은 연극도 속속 무대에 오르고 있다. 또 한 작품은 국립극단이 내달 4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하는 ‘오슬로’다. 지난해 토니상 최우수연극상 수상작으로 이성열 국립극단 예술감독의 연출로 선보이는 이번 연극은 1993년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총리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이 물밑에서 벌였던 ‘오슬로 협정’의 뒷얘기를 다룬 작품이다.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지구 반대편 노르웨이 땅에서 벌어진 이야기지만, 이 작품은 그야말로 ‘먼 데서 온 우리의 이야기’처럼 지금의 한반도를 거울처럼 비춘다.
평화로 향하는 작은 발걸음은 놀랍게도 노르웨이의 한 부부의 손에서 시작됐다. 노르웨이 외무부 직원 모나 율(전미도)과 사회과학연구소장인 티에유 로드-라르센(손상규)은 이스라엘 가자지구에서 우연히 총과 맨손으로 만난 팔레스타인 소녀와 이스라엘 소년을 목격하게 된다. 두 소년, 소녀가 똑같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음을 깨달은 부부는 ‘포괄주의’라는 외교적 공식 속에 헛바퀴만 돌고 있는 미국 주도의 이·팔 평화 협상 테이블 대신 ‘점진주의’ 모델을 적용한 비밀회담을 주선해보기로 한다.
평소 티에유가 성공적인 협상 모델로 설파해온 ‘점진주의’는 대립하는 양자가 논쟁 중인 이슈 하나에 초점을 맞춰 토론을 벌이고 이슈를 해결하면 그 과정에서 형성된 신뢰를 바탕으로 다음 이슈를 논의하는 방식을 취한다. 독특한 점은 회담의 당사자들이 회담에선 격렬하게 싸우되 회담 이후에는 음식과 이야기를 나누고 술을 마시며 친구가 되라는 것이었다. 지난 4월 첫 남북정상회담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수행원을 멀리하고 담소를 나눴던 ‘도보다리 회동’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안타깝게도 평화의 목전까지 간 듯 보였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끝내 한 걸음을 내딛지 못했고 협상의 당사자들은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멀리서 온 실패담을 굳이 들려준 이유로 이성열 감독은 “평화로 가는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 그럼에도 평화를 얻기까지 희생과 양보, 어떤 난관에도 좌절하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작품이 전하는 또 한 가지 메시지는 평화를 상상하고 실행하는 일은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누구든 힘을 보탤 수는 있다는 것이다.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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