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 광주에서 출생한 선생은 일제의 침략이 자행되던 시기에 전국을 순회하면서 현실을 두루 살피고 고향으로 돌아와 서당을 차려 후학을 육성했다. 1906년 태인에서 을사늑약에 반발해 최익현과 임병찬 등 ‘순창 12의사’가 의병을 일으켰으나 서울로 압송되고 최익현은 대마도에서 순국했다. 1907년 호남지방에서 기삼연과 김준 등이 고창읍성을 점령하는 등 맹활약을 떨치자 선생은 그해 12월 중순 김준 의진(義陣)에 합류해 좌익장으로 활동했다. 함평읍, 창평 무동촌, 장성 낭월산, 영광 월암산, 광주 어등산(魚登山) 등 수많은 전투에서는 선봉장으로 나섰다.
1908년 어등산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의병장 김준이 순국한 상황에서 일본군이 추격해오자 함평 당산촌 나평집(羅平集)으로 후퇴했다. 일본군의 진압작전이 종료되고 감시망이 느슨해지자 흩어진 의병들을 다시 모아 전열을 정비했다. 전북 이석용 의병부대에서 활동하던 전수용과 연합해 200여 명 규모로 부대를 재편하고 의병장이 됐다. 일본제 30년식 보병총과 기병총 4정, 한병총(韓兵銃) 12정, 천보포(千步砲) 8문, 개조 화승총 약 60정 등의 열악한 무기로 일본 군경과 맞서 싸웠다.
1909년 1월 조경환 의병부대는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20명이 전사하고 10명이 붙잡혔다. 선생은 총탄을 맞고서도 부하들의 명단을 불사르고 순국했다. 정부는 1963년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권홍우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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