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11월10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큰불이 났다. 화재는 설상가상으로 불어오는 강풍으로 인해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불길을 잡기 위해 궁궐수비대와 소방대 등 수백명이 달려들었지만 소용없었다. 왕이 정사를 보던 희정당 역시 이 화마를 피해가지 못했다. 화재가 진압된 후 일제는 창덕궁 재건을 위해 경복궁에 있던 건물들을 해체해 그 자재를 이용하기로 한다. 더 기막힌 일은 일제가 경복궁 강녕전을 해체해 희정당 복원에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정면 5칸이던 희정당 규모가 11칸으로 늘었지만 겉만 조선식이지 내부는 서양식으로 완전히 바뀌었고 앞에는 자동차를 위한 현관까지 마련됐다. 이름만 희정당이지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완전히 딴 건물이 들어선 것이다.
희정당은 1496년 연산군 때 ‘숭문당(崇文堂)’이라는 건물이 소실되자 이를 재건하면서 이름을 바꾼 건물이다. 원래는 왕의 침전으로 사용됐지만 정조 승하 이후 왕의 집무실 역할을 하던 선정전이 신위를 모시는 혼전(魂殿)으로 사용되자 순조 때부터 편전의 역할을 대신했다.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영조가 영의정 조태억 등과 함께 진압 방안을 논의한 곳도, 효종이 노론의 거두 우암 송시열과 함께 북벌에 대해 의견을 나누던 장소도 희정당이었다. 조정중신들이 헌종의 뒤를 이을 임금으로 ‘강화 도령’을 점찍은 곳도 이곳이다. 철종은 재위 14년간 거의 모든 정무를 희정당에서만 봤다.
‘정치를 잘해 모든 일이 잘되고 백성들이 즐거워진다’는 뜻과는 달리 희정당은 수많은 시련을 겪었다. 임진왜란 이후 세 차례나 화마로 인해 무너진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순조 즉위 이후부터는 정순왕후를 비롯한 왕후들의 수렴청정 시대가 도래하면서 왕실 외척들의 세도정치가 판을 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대리청정을 하던 효명세자가 안동김씨 등 권문세가들의 폐단을 없애고 왕권을 강화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21세의 젊은 나이에 느닷없이 생을 마친 곳도 바로 희정당이다.
문화재청이 그동안 문화재 보호를 위해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희정당 내부를 이달 말까지 한시적으로 공개한다. 아직 문화재 보수와 내부 정비가 완전하게 이뤄지지 않았지만 진행 과정을 국민과 공유한다는 차원에서 이뤄졌다는 것이 문화재청의 설명이다. 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창덕궁과 희정당을 찾아 그 속에 담긴 시대적인 아픔을 한번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송영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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