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일부 지역에서 급속한 집값 하락이 발생하면서 매매가격이 전세 보증금보다 낮아 집을 팔아도 전세금을 세입자에 돌려주지 못하는 ‘깡통전세’ 현상이 속출하고 있다. 2년 전보다 전셋값이 떨어져 집주인이 재계약을 하면서 세입자에 돈을 돌려줘야 하는 곳 또한 부지기수다.
12일 부동산업계와 국토교통부, 한국감정원 등에 따르면 최근 이러한 ’깡통전세’와 ‘역전세난’ 현상이 경남, 경북, 충남, 충북 등 장기간 매매·전셋값이 동반 하락 또는 2년 전 대비 매매가격이 전셋값보다 더 많이 떨어진 지역들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다.
창원시는 현재 매매가격이 2년 전 전셋값 밑으로 떨어지면서 재계약 분쟁이 늘고 있다. 성산구 대방동 S아파트 전용면적 84.9㎡는 2년 전 전세가 2억∼2억2,000만원에 계약됐는데 현재 매매가격이 이보다 평균 4,000만원 낮은 1억6,000만∼1억8,000만원으로 하락했다. 2년 간 매매가격이 크게 떨어지면서 전셋값이 매매가격보다 높아진 것이다. 전셋값 또한 2년 전보다 내려 집주인이 집을 팔지 않고 전세를 재계약하려면 오히려 세입자에게 돈을 반환해야 한다.
한국감정원의 주택가격 통계에 따르면 창원시 성산구는 최근 2년 새 아파트값이 21.87% 하락하면서 전셋값이 13.28% 내린 것에 비해 더 큰 매매가 낙폭을 보였다. 감정원 조사 결과 최근 이 지역에서 거래된 전세 물건의 65%가 ‘깡통전세’ 위험군에 속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방동의 한 중개업소 대표는 “작년부터 이 일대 새 아파트 입주가 크게 늘면서 매매·전셋값이 동반 하락했는데 특히 매매가격이 더 많이 떨어졌다”며 “2년 새 집값이 20% 넘게 떨어지니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또다른 중개업소 대표는 “새 아파트보다 낡은 아파트일수록 역전세난이 더욱 심하다”며 “집주인은 집을 팔아도 전세금을 못 내주는 실정이고, 세입자는 제때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면서 갈등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집을 사서 전세를 놓으면 전세보증금으로 매매가격을 갚고도 남아 이를 이용한 투기수요까지 나오고 있다. 창원의 한 중개업소 대표는 “매매가가 1억1,000만원인데 전세 시세는 1억원에서 최대 1억3,000만원까지도 받을 수 있어 전세보증금을 받으면 매매가격을 갚고도 최대 2,000만원이 남는다”며 “이런 점을 노리고 싼 매물이 나오면 집을 사겠다는 문의 전화가 심심찮게 걸려온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매수자가 이런 상황을 악용할 경우, 전세금을 떼이거나 보증금을 제때 돌려받지 못해 세입자들의 피해가 더욱 커질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지방의 깡통주택, 깡통전세가 늘어나는 가장 큰 원인은 입주물량 증가다. 2010년 이후 지속된 수도권 주택시장 침체로 2014∼2016년에 걸쳐 지방을 중심으로 새 아파트 분양이 크게 증가하면서, 지난해부터 이들 지역의 입주물량이 급격하게 늘었다.
부동산114 조사 결과 경상남도의 경우 2010년대 초반 연평균 6,000∼2만가구에 불과하던 새 아파트 입주물량이 지난해 4만여가구로 2배 이상 급증했다. 올해 입주물량도 3만7,000여가구에 달하고 내년 역시 3만5,000여가구의 입주가 대기중이어서 ‘물량 폭탄’의 후폭풍이 내년까지 이어질 전망이다.
충청남도도 2016년에 2015년 대비 2배가 넘는 2만2,500가구로 준공이 늘어난 데 이어 지난해 2만4,500가구, 올해 2만6,000가구로 연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충북 역시 2010년 초반 연평균 5,000가구 미만이던 입주물량이 올해 2만2,000여가구로 급증했다.
평창동계올림픽 이후 매매, 전셋값 하락세가 두드러지고 있는 강원도는 지난해까지 입주물량이 5,500여가구에 그쳤지만 올해는 입주물량이 3배가 넘는 1만8,000가구에 육박하고, 내년에도 1만7,000여가구가 준공돼 역전세난이 우려되고 있다.
조선·자동차 등 지역 기반 산업의 위기에 따른 경기침체 또한 집값 하락 가속화의 주요 원인 중 하나다. 거제시의 한 중개업소 대표는 “산업 침체로 월급 근로자는 물론 자영업자들도 소득에 급격하게 줄었는데 부동산 시장이라고 버텨낼 수 있겠느냐”며 “한 달 내내 거래 한 번 못해본 중개업소가 부지기수”라고 말했다.
지방의 집값 하락과 역전세 문제는 심화하고 있지만 정부의 대응은 미온적이다. 국토교통부가 지난 9·13대책에서 지방 미분양 관리를 강화해 미분양이 많은 지역의 주택공급 물량을 조정하고 깡통전세, 역전세 위험지역의 세입자 보호를 위해 전세보증금 반환보증에 대한 위축지역 특례제도를 도입하기로 한 것이 조치의 전부다. 미분양 관리지역에서 시행하는 전세금 반환보증 특례보증은 전세계약 종료 6개월 전까지 가입을 허용하고, 보증기관의 보증금 대위 변제에 따른 임대인의 지연 배상금을 6개월간 면제해주는 것인데 최근 급증하고 있는 임대차 분쟁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으로는 미흡하다는 지적이 많다.
정부가 지방 등 집값 하락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도입한 ‘청약위축지역’은 실익이 없다는 이유로 아직 한 군데도 지정되지 않았다.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지방 역전세난은 지속적으로 모니터링중이지만 그간 많이 올랐던 집값이 안정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정부가 손 쓸 방법이 별로 없다”며 “아직 전세보증금 반환보증 특례제도 외에 다른 지원방안은 고려치 않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최근 역전세난이 지방뿐만 아니라 입주물량이 많은 수도권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만큼 좀 더 적극적인 대응책을 검토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우리은행 부동산투자자문센터 안명숙 부장은 “내년 이후에는 지방뿐 아니라 서울·수도권 주택시장도 올해보다 나빠질 것”이라며 “과도한 집값 하락 지역은 세입자 등 선의의 피해가 발생할 수 있어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권혁준인턴기자 hj7790@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