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가까운 남한산성은 개인적으로 많은 추억이 서린 곳이다. 이런저런 기억의 편린을 주워 모아가며 남한산성 곳곳을 종일 거닐다가 해 질 녘 오후에야 다다른 남한산성의 서문 밖은 어느덧 사위가 어스름해졌다.
지난 201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남한산성에서도 이곳 서문 전망대는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보여 여행객은 물론 사진작가와 동호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 중 명소다. 명징한 사진 한 컷 건져보겠다는 마음으로 전망대에 올라 연무에 깊이 잠긴 송파 쪽으로 시선을 돌리기도 하고 팔당 물안개 공원과 천진암을 응시해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발길을 돌려 다시 서문 쪽 국청사를 향했다. 카메라와 삼각대를 둘러메고 어둠 속을 더듬어 전망대에 도착하니 이미 두 사람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송파를 밝히는 불빛들은 은하수처럼 거리를 메웠고 땅을 밀고 터를 다지는 위례는 아직 어둠에 묻혀 있었다.
한참이나 송파와 위례를 바라보던 중 문득 소설가 김훈과 인터뷰했던 2007년의 기억이 떠올랐다. 동행했던 이미숙 문화관광 해설사가 던진 “김 선생은 소설 ‘남한산성’을 집필하기 전에 이곳을 여러 번 방문했다”는 말 때문이었나 보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2007년 12월 학고재 출판사의 어느 골방문을 열고 들어가는 장면이 떠올랐다. 당시 김 작가와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자전거 여행’ 중에 나왔던 ‘남한산성’에 대해 질문을 건네자 그는 “자전거로 남한산성을 돌아볼 당시에 이미 소설의 틀은 어느 정도 짜여 있었노라”고 답했었다. 그렇게 나온 소설 ‘남한산성’은 대하소설로는 기록적인 30만부 판매를 기록했고 그로부터 10년 만에 영화 ‘남한산성’이 개봉돼 흥행에 성공했다. 영화는 소설에 담긴 최명길과 김상헌의 수사를 그대로 재연했고 현란한 논리와 화려한 수사는 관객들의 뇌리에 각인됐다.
어쩌면 나는 그때 김훈의 모습을 추억하기 위해 가을의 끄트머리에 남한산성에 올라 다시 송파의 야경을 바라보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를 인터뷰한 것은 2007년 ‘자전거여행’이 출간된 직후였다. 요즘 여행서적들은 여행기를 사진으로 도배하고 있지만 그의 수필집에는 사진작가 강운구가 찍은 태백 준령의 만산홍엽 사진 한 장을 제외하면 어떤 시각물도 없었다. 감각에 의존을 거부하고 글로 승부한 그 책은 그럼에도 내 주관 속에 당대 최고의 여행기로 분류돼 있다.
역사적으로 남한산성은 삼국시대부터 나라의 패권을 결정짓는 요충이었다.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산성 안에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의 사당인 숭열전이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실제로 신라 문무왕 때 처음 쌓은 산성은 왕조가 바뀌면서도 계속 축조되고 복원됐다. 남한산성의 전략적 가치가 조선 시대라고 퇴색할 리는 없었다. 조선조 인조 2년(1624년)에 축성을 시작해 인조 4년에 완공,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이 해설사는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이미 전쟁을 대비해 산성 안에 모민입거(募民入居)했고 관청을 들여 1,000가구가 들어와 살 정도였다”면서 “전쟁이 나면 강화도 행궁이 1순위였지만 청군이 밀어닥쳐 길을 차단하는 통에 남한산성으로 들어오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토록 유구한 역사를 지닌 남한산성은 지금까지도 성안은 숲이 울창하고 아름이 넘는 나무들로 가득하다. 산성 내에 있던 금림조합 덕분이다. 금림조합은 나무가 생활 연료였던 시절에 남한산성 주민들로 조합을 만들어 산림감시원 50명을 선출했고 매일 6명씩 교대로 산림을 감시하도록 했다. 극빈층에서 선발된 이들은 소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까지 도맡았는데 이는 취약계층의 구제 수단이기도 했다.
산성 탐방을 마치면서 이 해설사는 남한산성은 비단 전쟁 피신지로서뿐 아니라 백성들의 생활 터전으로도 가치가 높았음을 강조했다. “성은 전쟁이 나면 피신하는 곳이 아니라 평시에도 백성들이 살았어요. 남한산성 여자들은 산성댁이라 불렸는데 성안의 양반이나 왕가의 풍습을 보고 배웠기 때문에 시집을 가서도 괄시를 받지 않았답니다.” /글·사진(경기도 광주)=우현석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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