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 기념일인 11월11일 파리의 개선문에서 열린 국제행사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애국심은 국가주의와 정확히 반대다. 국가주의는 애국심에 대한 배신”이라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앉아 있는 바로 앞에서 작심하고 그런 연설을 한 것이다. 자기 나라만을 내세우는 ‘국가주의’가 얼른 생각하면 애국심에서 나온 것 같지만 사실은 자국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정말로 애국심이 있다면 반대로 행동해야 한다는 뜻이다. 현실 세계에서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트럼프 대통령은 스스로를 ‘국가주의자(nationalist)’라고 하는데 미국 우선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취해온 조치 중에 기후변화협약 탈퇴를 생각해 보자. 세계 모든 국가들이 탄소 배출을 스스로 줄여 기후변화로 인한 지구의 온도 상승을 막겠다는 2015년 파리협약에서 벗어나는 것이 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될까. 미국의 탈퇴가 가져오는 가장 큰 문제점은 미국 산업계가 탄소를 많이 배출해 세계의 환경을 오염시킬 우려보다는 파리협약 이행을 위한 정치적 리더십의 손상에 있다. 학자들은 협약상의 탄소 감축 공약을 모든 국가가 충실히 이행해도 지구의 온도 상승을 2도 이내로 막아내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이 세계 각국의 공약 준수를 독려하는 솔선수범의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공동 대처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파리협약이 제대로 이행되지 못해 지구 환경이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나빠진다면 여러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하는 미국에 큰 부담을 주게 된다. 미국 기업들이 탄소배출 의무에서 면제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작은 이익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규모의 국익 손실을 입게 될 것이다.
국가의 이익을 이야기할 때 단기 또는 장기적 국익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즉, 몇 십 년 후에는 손해일지 모르지만 우선 몇 년간의 이익이 중요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도 한다. 하지만 가속적으로 세계화가 진행되고 있는 오늘의 국제사회에서는 국익을 장·단기로 나눠 생각하는 자체가 무의미해졌다고 본다. 과거에 30년에 걸쳐 일어나던 일들이 이제는 3년 만에 일어나는 세상이 됐기 때문이다. 점점 강도와 빈도가 높아지는 자연재해들을 보면서도 기후변화의 부정적 영향을 ‘장기적’ 과제로 보고 우선의 경제적 손익에만 집착한다면 단견을 넘어 어리석음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Brexit)가 영국에 가져오는 이익과 손실도 오래 기다리지 않고 분명해질 것이며 미중 무역전쟁의 손익계산서도 이미 나오고 있다.
1차 대전이 끝나고 국제사회는 국제연맹을 창설해 다시는 그처럼 참혹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단합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불과 20년도 안 돼 국가들은 눈앞의 손익에만 집착한 나머지 전체주의의 부상과 무력 침략을 막지 못했고 1차 대전보다 훨씬 더 파괴적인 2차 대전을 겪었다. 마크롱 대통령의 ‘국가주의는 애국심에 대한 배신’이라는 지적은 세계가 또다시 눈앞에 다가오는 재앙 속으로 무기력하게 걸어 들어가고 있는 데 대한 절망의 외침처럼 들린다.
우리나라도 현재의 외교 현안들을 진정한 국익은 무엇인가 하는 성찰의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우리만의 국익을 위해 국제사회와 다른 방향으로 걸어야 할 때도 있었지만 이제 그러한 선택은 통하지 않는 것 같다. 국제사회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질수록 전 세계에 도움이 되는 일이 우리에게도 이익이 되는 경우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북한 핵 문제를 놓고 ‘북미 간의 기싸움’ 등 마치 우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일처럼 언급되는 경우를 가끔 본다. 북한의 핵 보유는 국제 핵 비확산은 물론이고 동북아의 전략적 균형에도 중요한 변수로서 북미 간에만 다뤄질 이슈가 아니다. 우리는 남북관계의 특수성과 함께 국제적 시각을 유지해야 한다. 그밖에도 일본과의 외교 갈등 해소, 무역 자유화, 개발 협력, 난민 지원 등 모든 외교 문제에 포괄적 국익의 잣대가 적용될 필요가 있다. 개방된 경제와 민주국가로서의 가치관에 바탕을 두고 급속히 성장한 우리에게 국가주의와 세계주의 중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는 이미 답이 나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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