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피살 사건에 대한 입장표명을 놓고 거센 후폭풍에 직면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20일(현지시간) 성명을 통해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살해를 지시한 것으로 드러나더라도 “미국은 사우디의 변함없는 동반자로 남을 것”이라며 배후설이 제기된 무함마드 왕세자에게 정치적 면죄부를 주는 쪽으로 사실상 사건의 ‘종결 선언’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사우디로부터 얻는 경제적 이익을 적시하며 자신의 결정이 국가 이익을 위한 것이라며 이번에도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를 전면에 내세웠다. 전 세계적으로 파문을 몰고 온 반체제 언론인 피살 사건에서도 ‘명분’보다는 무기판매 등 ‘실리’를 택한 셈이다. 이를 두고 미국 언론과 정치권 안팎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무기판매 등 경제적 이익을 위해 인권 등 미국이 그동안 소중히 여겨온 전통적 가치를 헌신짝처럼 버렸다는 비판론이 일고 있다. 민주당뿐 아니라 여당인 공화당에서도 비난 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대(對) 사우디 제재 필요성이 계속 거론되고 있어 의회 차원의 대사우디 제재 입법화가 현실화될지에 관심이 쏠린다.
트럼프 대통령의 성명은 이번 사건의 배후로 무함마드 왕세자를 지목한 것으로 알려진 미 중앙정보국(CIA)의 판단과도 다른 것이다. 워싱턴 정가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러시아 대선 개입 사건 때에 이어 또다시 정보기관과 ‘엇박자’를 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한 정부 관계자도 “정보기관 당국자들은 무함마드 왕세자가 이번 살해를 사주했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7월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미·러 정상회담 직후에도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 결론을 내린 미 정보기관의 조사결과보다 이를 부인한 푸틴 대통령을 옹호했다가 거센 역풍을 맞은 바 있다.
CNN방송은 “트럼프의 사우디 지지는 ‘미국 우선주의’ 독트린의 야만성을 부각해주는 것”이라며 이번 성명으로 인해 ‘트럼프 독트린’의 민낯이 드러났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CNN은 “트럼프 대통령은 전 세계의 독재자들에게 자신의 편에 선다면 워싱턴은 미국의 전통 가치들을 위반해도 눈을 감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발신했다”며 수세대에 걸쳐 소중히 여겨온 원칙들을 팔아넘기려고 내놓은 셈이라고 비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무함마드 왕세자 등 사우디 왕실을 사실상 ‘비호’하는 쪽으로 이번 사건에 종지부를 찍은 데는 사우디가 미국산 무기 구매의 ‘큰 손’이자 중동 내에서 이란을 견제하는 ‘전략적 축’이라는 점 등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사우디와의 ‘전략적 동맹·제휴’ 관계의 틀을 흔들었을 때 당장 미국으로선 ‘득’보다 ‘실’이 많다는 생각으로 기운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사건에 대해 초기부터 사우디 왕실이 배후에 있다면 “가혹한 처벌”이 있을 것이라면서도 무기판매 중단 등 경제적 제재에 대해서는 일자리 창출 타격 등을 들어 부정적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러나 공화당 내에서도 비난론과 함께 대사우디 제재 주장이 쏟아지는 등 파장이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랜드 폴(켄터키) 상원의원은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성명에 대해 “나는 이것은 ‘사우디아라비아 퍼스트’이지 ‘아메리카 퍼스트’가 아니라는 걸 상당히 확신한다”고 저격한 뒤 “나는 존 볼턴(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보좌관)이 이걸 썼을 것이라고 상당히 확신한다”고 볼턴 보좌관까지 겨냥했다. 그는 그러면서 “나는 사우디 무기판매를 중단하기 위한 입법을 계속 추진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마크 루비오(플로리다) 상원의원도 트위터 글에서 “우리의 외교 정책은 국익을 촉진하는 방향이어야 한다. 인권을 보호하는 것이 우리의 국익에 부응하는 것”이라면서 “인권 침해는 집단 이주를 초래하고 극단주의가 창궐하게 한다”라고 비난했다.
친(親) 트럼프계인 린지 그레이엄(사우스 캐롤라이나) 상원의원도 “사우디 왕실 일원들까지 포함해 모든 문명화된 규범을 거스르는 이 야만적 행위에 대해 무거운 제재를 가하는 것에 대해 강력한 초당적 지지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며 아무리 사우디가 전략적 동맹이라고 하더라도 카슈끄지 살해사건에 대해 못 본 척 하는 것은 미국의 안보 이익에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논란이 증폭되는 가운데서도 21일에는 국제유가 급락과 관련, 사우디의 ‘공’(功)을 치켜세우는 등 일단 ‘마이웨이’를 가려는 모양새이다. 그는 이날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유가가 낮아지고 있다”면서 “사우디에 감사한다. 그러나 (유가를) 더 낮추자”고 말하며 ‘땡큐, 사우디’를 외쳤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트럼프 대통령이 유가 하락을 명분으로 삼아 무함마드 왕세자 두둔에 대한 비난 여론을 돌파하려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있었다. 그는 전날에도 기자들에게 “만약 우리가 사우디와 관계를 단절한다면 기름값이 지붕을 뚫고 치솟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서영인턴기자 shy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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