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화 설비전문 업체 톱텍이 중국에 휴대전화기 핵심 기술을 유출한 사건의 배경에는 ‘을(乙)의 배신’이 자리하고 있다. 톱텍은 삼성디스플레이의 자동화 설비 제작 업무를 도맡다시피 한 1차 협력회사로 꼽힌다. 기간만 해도 강산이 세 번 변한다는 30여년에 달했다. 그만큼 오랜 기간 가깝게 지냈다는 것이다. 국가정보원 산업기밀보호센터가 지난 5월 ‘톱텍이 중국 기업에 핵심 기술을 유출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도 본격 조사까지 심사숙고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30여년이라는 기간 ‘동반자’의 길을 걸어온 톱텍이 삼성디스플레이 등에 ‘칼’을 꽂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대(對)삼성디스플레이 매출 비중이 크다는 점에서 톱텍이 중국에 핵심 기술을 유출하고 얻은 실익도 그다지 크지 않았다. 자칫 잘못된 선택이 오랜 기간 함께한 주요 매출처의 납품 중단이라는 위기만 가져올 수 있었다.
국정원 산업기밀보호센터는 첩보·정황 등을 종합해 물밑조사에 착수했다. 특히 그 과정에서 B사와 BOE 사이의 설비 계약서를 확보하면서 조사에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다. 당시 국정원 산업기밀보호센터가 예의 주시한 부분은 B사가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는 신생 업체라는 점이었다. 통상 대외 거래 이력이 많지 않은 기업이 중국 최대 디스플레이 생산업체로 꼽히는 BOE와 공급계약을 맺는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다. 게다가 B사 등기부등본에 나온 주소가 거짓이라는 점에서 의혹은 점차 확신으로 바뀌었다. 조사력을 총동원한 결과 국정원 산업기밀보호센터는 B사가 톱텍 대표 A씨의 형수 명의로 설립된 회사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톱텍과 B사, 그리고 BOE로 이어지는 핵심 기술 유출 과정의 ‘검은 커넥션’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결정적 증거를 확보한 국정원 산업기밀보호센터는 첨단산업보호 중점 검찰청인 수원지검에 사건을 지난 8월 이첩했다. 첩보를 입수해 조사에 착수한 지 3개월 만에 핵심 증거 등을 검찰에 넘기는 초고속 조사였다.
바통을 넘겨받은 수원지검 인권·첨단범죄전담부(김욱준 부장검사)는 곧바로 혐의 입증에 주력했다. 9~10월 톱텍 본사 등에 대한 압수수색을 시작으로 본격 수사에 나섰다. 특히 부산항만을 압수 수색해 수출 직전의 3D 래미네이션 설비 8대를 확보하면서 추가 피해도 막았다. 수사 대상에 오른 이들의 차명폰 등 증거물을 대거 확보한 시기도 이때였다. 또 연이은 관련자 소환 조사로 10월17일 톱텍 설계팀장 D씨를 처음으로 구속했다. 이후 전직 톱텍 전무이자 B사 부사장 C씨의 신병도 이달 2일 확보했다. 그리고 B사를 통한 핵심 기술 유출을 기획·지시한 톱텍 대표 A씨도 15일 구속했다. ‘톱텍→B사→BOE’로 이어지는 주요 기술 유출에 관여한 핵심 피의자들의 신병을 모두 확보해 재판에 넘긴 것이다. 아울러 이들은 물론 범행에 가담한 8명을 불구속기소 했다. 공범인 BOE 임원에 대해서는 기소중지했다. 특히 A씨 등은 톱텍이 지난해 사상 최대 매출을 기록한 후 올해 매출 유지가 어렵게 되자 중국 업체들을 먼저 찾아가 중요 기술을 넘길 테니 돈을 달라고 한 것으로 파악됐다. 지금까지 함께해온 오랜 기간의 인연보다 당장 눈앞의 ‘돈’을 선택한 셈이었다. 게다가 수사망을 피하기 위해 위장 간판을 단 사실도 확인했다. B사의 등기부상 소재지를 텅 빈 공장에 두고 협력업체의 위장 간판을 단 공장에서 설비를 제작하는 등의 방식으로 삼성디스플레이의 원본 기술자료 등을 그대로 가져와 부정적으로 사용했다. 또 차명폰을 사용하고 사내 메일 대신 개인 e메일을 사용하는 등 조직·계획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점도 드러났다.
삼성 측은 핵심 기술 유출 소식에 내부적으로 바짝 긴장하는 모습이다. 중국에 유출된 기술은 스마트폰 화면에서 휘어진 양 끝 곡면 부분의 패널과 유리를 초밀착시켜 접합하는 고난도 기술이다. 그만큼 6년간 엔지니어 38명이 달라붙었고 연구비만도 1,500억원을 쏟는 등 공을 들였다. 삼성 내부에서 “착오 없이 제품에 반영되도록 안정화하는 데 수년이 걸리는 등 힘들게 완성한 기술이 넘어가면서 중국의 추격 속도가 빨라질 것”이라고 우려가 나오는 이유도 지금껏 개발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 검찰도 핵심 기술 유출의 여파로 3년간 6조6,000억원의 매출이 감소하고 영업이익은 1조원 정도 감소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와 관련해 톱텍 측은 3월쯤 삼성디스플레이에 중국 고객사로의 수출 사실을 사전에 설명한 다음 곡면 합착기를 수출한 바 있다고 밝혔다. 또 중국에 수출한 곡면 합착기가 톱텍의 기술로 제작된 설비이며 곡면 합착기 설비를 수주한 것 외에 삼성디스플레이의 산업기술 내지 영업비밀 자료를 중국 거래 업체에 제공한 바가 없다는 입장이다. /안현덕기자 alway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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