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1년 미국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시에 있는 법원 건물이 CNN의 헤드 라인을 장식했다. 세상을 뒤흔든 판결 덕분도, 1억 달러를 투자해 만든 건물의 멋진 외관 때문도 아니었다. 엉뚱하게도 당시 방송에서는 여성을 배려하지 않는 무신경한 디자인이 도마 위에 올랐다. 앵커와 취재 기자는 원피스나 치마를 입은 여성의 속옷이 훤히 들여다보이도록 설계된 법원의 유리 계단을 문제 삼았다. 법복 안에 주로 원피스를 입는다는 줄리 린치 판사는 “애먼 경비원들이 일일이 여성 방문자들에게 계단 이용에 조심할 것을 당부하는 고생을 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미국 일리노이대학교의 여성학과 교수인 캐스린 H.앤서니가 쓴 ‘좋아 보이는 것들의 배신’은 우리가 입는 옷, 구매하는 제품, 일하고 노는 공간의 디자인에 숨은 차별을 폭로하고 주목할 만한 해법을 제시한다. 대학에서 젠더 문제를 가르치는 저자는 미국 사회에서 디자인에 얽힌 편견과 차별에 꾸준히 목소리를 내온 건축가이기도 하다.
책은 10년 동안 끈질기게 실제 사례와 시민의 증언을 수집하고 분석한 저자의 집념이 집대성된 결과물이다. 저자는 젠더와 연령, 사람의 체형을 넘나드는 레이더망을 가동하면서 남녀노소, 키가 작은 사람과 큰 사람, 마른 사람과 뚱뚱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취재했다. 책은 풍부한 사례와 성실한 취재를 통해 “공간은 이데올로기나 정치와 동떨어진 과학적 사물이 아니다. 공간은 언제나 정치적이었다”는 프랑스 사회학자 앙리 르페브르의 통찰을 입증한다.
먼저 저자는 우리가 출장길에 오를 때, 여행을 떠날 때 무심코 탑승하는 비행기를 “불친절한 하늘을 나는 기계”라고 꼬집는다. 승객 좌석 바로 위에 위치한 짐칸은 키가 작은 승무원의 어깨 부상을 유발하는 경우가 많고 특정 기종의 여객기는 통로 너비가 하도 좁아서 승무원이 몸을 비틀어가며 승객을 응대해야 할 정도다. 항공 승무원의 부상 및 질병 발생률이 민간 기업 직원의 4배, 건설 노동자의 2배 이상이라는 미국 노동통계청의 데이터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밖에도 차별을 내재한 일상 속의 ‘나쁜 디자인’은 차고 넘친다. 키가 작은 남자들은 배 아래로 늘어지지 않는 넥타이를 찾기 힘들고, 엄마들에겐 아기한테 젖을 물리거나 기저귀를 바꿔줄 공간이 절실하다. 웬만큼 키가 큰 어린아이가 아니라면 욕실 세면대에 손을 올려놓기도 힘들다.
저자는 저마다의 개성과 특징을 지닌 시민을 두루 배려하는 대신 불평등만 초래하는 디자인의 차별성을 열거한 뒤 이를 개선할 해법으로 ‘포용적 디자인’의 개념을 소개한다. 다소 뜬구름을 잡는 듯한 이 개념을 실제 사업장에 구현한 회사는 세계적인 정보기술(IT) 기업인 구글이다. 지난 2015년 말 미국 시카고에 문을 연 신축 사옥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그날의 기분에 따라 의자와 책상을 선택해서 일할 수 있다. 사무실을 채운 갖가지 디자인의 의자와 책상은 어떤 체형의 직원도 소외되는 일 없이 모두에게 너른 선택의 폭을 제공하고 편안한 업무 환경을 제공한다. 사옥을 수직으로 가로지르는 개방형 계단은 층간 의사소통을 촉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넓게 설계했다. 이 널찍한 공간에서 직원들은 다른 사람의 통행을 방해하는 일 없이 자유롭게 멈춰 서서 대화를 할 수 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저자가 서문을 통해 미리 밝힌 당당한 다짐이 결코 알맹이 없는 허언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시민으로서 또한 소비자로서 우리에게는 일상의 곳곳에 도사린 ‘디자인의 힘’을 다스릴 능력이 충분하다. 이 책은 우리의 권력을 행사해서 우리에게 유리한 세상, 지금보다 안전하고 행복하고 편안한 세상을 디자인할 방법을 제시한다. 이를 통해 독자가 자신의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을 영원히 바꿔놓을 것이다. 작은 상황 인식들이 쌓여 변화의 들불이 일어난다.” 1만9,800원 /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 사진제공=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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