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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부시' 美 前 대통령 타계]냉전종식·동서화합…정적 클린턴에 "성공하라"

2차 세계대전 활약한 전쟁영웅

몰타 미소회담으로 역사의 한획

이라크戰땐 대군 파병해 승리

트럼프, 5일 '애도의 날' 지정

워싱턴 등서 11년 만의 국장

"평화에 기여" 세계 애도물결

조지 H W 부시(왼쪽) 전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지난 1991년 7월31일(현지시간) 모스크바에서 미·소 정상회담을 마친 후 가진 공동 기자회견에서 서로 마주보며 활짝 웃고 있다./모스크바=AFP연합뉴스




2009년 1월7일 백악관에서 조지 H W 부시(왼쪽부터) 전 미국 대통령이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 당선인, 아들인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지미 카터 전 대통령과 함께 모여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워싱턴 D.C=UPI연합뉴스


“난세의 시대, 미국을 이끌었던 그가 세상을 떠났다.”(뉴욕타임스)

냉전 종식 선언을 이끌어내며 세계 역사의 대전환을 주도한 미국 41대 대통령 조지 H W 부시 전 대통령이 향년 94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동서화합의 주역이자 미국 정치 명문가인 부시 가문의 수장으로서 남긴 정치적 업적뿐 아니라 퇴임 이후 초당파적인 행보로 존경을 받았던 세계적인 지도자의 사망 소식에 미 정치계는 물론 세계 각국에서도 애도의 물결이 일고 있다.

지난 11월30일(현지시간) 부시 가족의 대변인인 짐 맥그래스는 부시 전 대통령이 이날 오후10시10분 텍사스 휴스턴에 있는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수년간 파킨스병으로 투병해온 부시 전 대통령은 올 4월 부인 바버라 여사가 사망한 후 급속도로 상태가 나빠져 입·퇴원을 반복하다 7개월여 만에 생을 마감했다.

장남인 아들 조지 W 부시 전 미 대통령은 자신의 트위터 계정을 통해 발표한 성명에서 “사랑하는 아버지가 경이로운 94년을 보낸 뒤 돌아가셨음을 슬픈 마음으로 발표한다”면서 “그는 아들·딸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아버지이자 최고의 인물이었다”고 애도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5일을 ‘국가 애도의 날’로 지정하고 워싱턴DC 국립성당에서 열리는 장례식에 참석할 계획을 밝혔다. 그의 장례식은 2007년 제럴드 포드 전 대통령 이후 11년 만에 텍사스와 워싱턴DC에서 국장으로 치러진다.



1924년 매사추세츠 밀턴에서 태어난 부시 전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 동부 아이비리그 명문인 예일대 입학을 포기하고 자원 입대해 미 해군 최연소 전투기 조종사로 전쟁에 참전했다. 참전 중의 활약으로 전쟁영웅 반열에 오른 그는 전역 이후 1948년 예일대 경제학부를 졸업한 뒤 텍사스에서 석유 회사와 원양회사를 공동 창업하며 큰 부를 축적했다.

정치인으로서의 길은 순탄하지는 않았다. 1964년 상원의원에 도전했다가 고배를 마신 부시 전 대통령은 2년 뒤 텍사스주 하원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다. 1970년 상원의원에 도전했다 또 한 번 낙선한 그는 유엔 주재 대사와 국무부 주베이징 미 연락사무소장, 중앙정보국(CIA) 국장 등을 거치며 관직 경험을 쌓았다. 특히 1974년 수교도 맺어지지 않은 중국으로 건너가 사실상 초대 대사격인 주중 연락사무소 초대 소장을 맡은 그는 1979년 이뤄진 미중 수교의 초석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시간이 나면 자전거를 타고 베이징 골목을 누벼 ‘자전거를 탄 대사’라는 별명을 얻었던 그의 사망 소식에 중국 주요 매체들은 “아버지 부시는 ‘중국 인민의 오랜 친구’”라며 그를 추모했다.

1980년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 실패로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러닝메이트에 만족해야 했던 그는 1988년 대선에서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마이클 듀카키스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를 누르고 당선돼 4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대통령 임기 중 불어닥친 세계사적 변화의 바람에 힘입어 그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1989년 12월 몰타에서 열린 미·소 정상회담을 통해 40여년에 걸친 냉전의 종식을 선언하며 역사의 한 획을 그었다.

1991년에는 이라크에 침략당한 쿠웨이트를 해방한다는 명분하에 ‘사막의 폭풍’이라는 작전명으로 시작된 전쟁에서 33개국 약 12만명의 다국적군을 포함한 대군을 파병해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당시 한국도 군 의료진과 수송기 등을 파견했다. 하지만 이라크전 승리 이후 높은 인기에도 불구, 경기 침체와 만성적인 재정적자로 민심을 잃은 그는 1992년 대선에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에게 패배하며 재선에 실패했다.

재선 실패 이후 그는 정치적 고향인 텍사스주로 돌아가면서 후임이자 정적이었던 클린턴 전 대통령에게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비판 때문에 매우 힘든 시기가 있겠지만 결코 낙담하거나 경로를 이탈하지 말라”는 조언을 담은 편지를 남기며 미 정치사에 포용이라는 좋은 본보기를 남기기도 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그는 정치보다 사람을, 당파보다는 애국심을 앞에 뒀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의 별세에 트럼프 대통령 등 미국 정치권을 비롯한 각계에서 애도가 잇따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의 본질적인 진정성과 흔들리지 않는 나라에 대한 공헌은 미국의 위대함·희망·기회를 밝히는 1,000개의 불빛처럼 동시대의 세대를 공공에 봉사하도록 일깨웠다”고 그를 추모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도 “미국은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라는 애국적이고 겸손한 종복(servant)을 잃었다”며 애도했다.
/노현섭기자 hit8129@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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