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아르튀르 랭보는 반항과 방황의 아이콘으로 불린다. 서울 대학로 TOM 1관에서 공연 중인 한·중·일 합작 뮤지컬 ‘랭보’는 한편의 잔잔한 서정시 같았다. 랭보의 일생을 그린 이 작품에서는 유럽을 맨발로 돌아다닐 정도로 기행을 일삼았던 그의 삶이 주마등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지옥에서 보낸 한철’ ‘나의 방랑’ 등을 통해 나타난 랭보의 격정적인 시어와 심상은 생동하면서도 기행을 일삼았던 천재시인이라는 프레임은 걷어지고 시인이 직업인 한 사람의 일생이 담백하게 그려졌다. 그런 의미에서 창작뮤지컬 ‘랭보’는 화려한 볼거리를 기대하기 어렵지만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수수함이 빛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은 랭보, 베를렌느, 들라에 이 세 사람만이 등장해 랭보의 삶의 궤적을 훑는다. 들라에는 화가이자 랭보의 천재성을 알아봐 준 랭보의 가장 가까운 친구고, 베를렌느는 들라에와 마찬가지로 랭보의 천재성을 알아봐 준 인물로 랭보의 시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등장인물은 세 명으로 단출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했다. 세 배우들의 담백한 연기 ‘케미’가 극에 대한 몰입도를 높였기 때문이다. 정동화는 전통과 관습에서 벗어나 미지의 세계를 볼 수 있는 ‘투시자’가 되기 위해 방랑했던 랭보 역을, 김종구는 랭보와 시를 위해 가정을 버린 ‘비운의 시인’ 베를린느 역을 특유의 독보적인 존재감으로 표현해냈다. 들라에 역을 맡은 정휘는 청초한 매력으로 실제 들라에와의 싱크로율을 높였다.
‘랭보’의 담백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완성해내는 데는 잔잔한 넘버들의 역할이 컸다. 특히 랭보의 시로 쓴 ‘취한 배’ 베를렌느의 시로 쓴 ‘하얀 달’ 등은 두 시인을 가장 잘 표현해내면서도 작품의 서정성을 강화했다.
뮤지컬 ‘랭보’는 랭보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일지 무엇이며 진정한 행복과 인생의 의미란 무엇인가’라고 관객에게 질문을 던져줬다. 미지의 세계를 향해 끝없이 나아갔던 랭보의 일생은 꿈을 잃어버린 시대를 살고있는 관객들에게 과연 꿈이란 무엇인지 묻는다. 이를테면 우리는 랭보를 시인으로만 알고 있지만 그는 커피 원두를 선별하는 일을 하기도 했으며, 아프리카에서 밀수꾼이 되기도 했으며, 세관원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아이러니한 청년 구직자’이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삶의 궤적은 그가 쓴 일기를 통해 드러나는데, ‘취업 일지’ 비슷한 일기를 읽고 베를렌느는 “그래 이게 랭보가 말한 진정한 시야. 자신이 걸었던, 살아냈던 모든 순간이 진정한 시라고 말했던 거야”라며 탄복한다. “결국 어딜 가든 세상은 지옥”이라고 말한 랭보에게서는 시인으로서든 커피 검사원으로서든 고단했던 직장인의 삶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랭보’는 새해 1월 13일까지 TOM 1관에서 공연이 계속되며 랭보 역에 정동화·박영수·손승원·윤소호, 베를렌느 역에는 김종구·에녹·정상윤, 들라에 역에는 정휘·이용규·강은일이 각각 캐스팅됐다.
한편 한국과 중국 일본이 기획 단계부터 함께 참여해 주목을 받은 창작뮤지컬 ‘랭보’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해외공동제작지원사업으로 선정돼 중국에서는 오늘 이달 5~9일 600석 규모인 상하이대극원 중극장에서 공연되며, 일본 무대에도 곧 오를 예정이다. /연승기자 yeonvic@sedaily.com 사진제공=라이브(주), (주)더블케이필름앤씨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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