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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주 KAIST 경영대학 교수
분쇄된 원두가 들어 있는 캡슐, 캡슐을 머신에 넣고 버튼 하나로 손쉽게 추출해 마실 수 있는 캡슐커피. 이 커피는 지난 1974년 글로벌 식품기업인 네슬레가 바텔연구소로부터 기반 기술을 사들이며 시작된다. 네슬레는 이 기술을 바탕으로 작고 편리한 에스프레소 추출 머신을 완성했다. 이름은 네슬레와 에스프레소를 합쳐 ‘네스프레소(Nespresso)’로 지었다. 기존 시장에서는 육중한 크기를 자랑하는 에스프레소 머신이 주로 사용되고 있었다. 네스프레소는 작고 쉬운 조작이 차별화 포인트였다.
네슬레는 1986년 자회사를 만들어 본격적인 캡슐커피 사업을 시작한다. 네스프레소는 초기 고객을 에스프레소 머신을 이용하는 사무실·카페·레스토랑으로 잡았다. 기존 커피머신이 상당히 커서 작고 사용이 편리한 커피머신에 대한 수요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고객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머신의 크기가 작은 것은 사무실과 매장에 큰 가치를 주지 못했다. 오히려 기업에서는 커피 캡슐 가격에 부담을 느꼈다. 카페에서는 에스프레소 머신의 외형, 소리, 바리스타의 솜씨가 커피 맛을 좌우한다는 기존 카페 고객들의 믿음을 무시할 수 없었다. 바리스타들 또한 버튼 하나로 실행되는 머신이 자신들의 생계를 위협한다고 생각했다. 네슬레 본사에서는 괜한 사업을 시작해 체면만 구겼다고 판단했다. 결국 2년 만에 폐업을 검토해야 했다.
1988년 네슬레는 네스프레소 책임자로 외부 인사인 장 폴 가이야르를 영입해 한번 더 도전하기로 했다. 가이야르는 기존 비즈니스 모델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를 살펴봤다. 네스프레소가 제안하는 솔루션은 작은 크기와 편리한 사용성이었는데 목표 고객들은 이것이 필요할 만큼 불편을 느끼지는 않고 있었다. 문제가 없는데 솔루션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당연히 시장에서 먹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는 목표했던 고객이 가진 불편을 해결해주는 다른 솔루션을 내놓든지, 아니면 네스프레소가 해결할 수 있는 불편(문제)을 가진 고객군을 찾든지 해야 할 것이다.
가이야르는 목표 고객을 변경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스타벅스 같은 고급 커피를 좋아하는 부유한 가정주부들을 고객으로 설정했다. 이들 중에는 이미 에스프레소 머신을 가진 경우가 있는데 이용이 불편해 자주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동일한 이유로 구매를 미루는 사람들도 많았다. 가이야르는 이들에게 네스프레소 머신이 솔루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머신은 작고 쉬웠다. 부유한 가정집에 설치되는 것이므로 ‘커피계의 아르마니(이탈리아 명품 브랜드)’라고 불릴 정도로 머신 디자인에 신경을 썼다. 그동안 제때 팔리지 않아 재고 관리에 어려움을 겪던 커피 캡슐은 네스프레소 클럽이라는 이름으로 직접판매에 나섰다. 이러한 방식으로 회사는 고객들에게 보다 신선한 커피를 제공할 수 있게 됐다. 머신 가격은 최대한 싸게 해 누구나 구입할 수 있도록 초기 가격장벽을 낮췄다. 가이야르의 네스프레소는 목표 고객을 재설정하고 고객이 가진 문제를 해결하는 솔루션에 집중했다.
이러한 일관된 노력은 곧 결실을 냈다. 네스프레소는 2000년부터 10년간 매년 30% 이상의 성장률을 만들어냈다. 2011년 발행된 리포트에 따르면 커피 캡슐이 분당 1만2,300개씩, 연간 64억개 넘게 소비됐다고 한다. 하마터면 사라질 뻔한 비즈니스가 목표 고객, 문제, 솔루션에 집중해 구사일생한 것이다. 비즈니스 모델이 뭔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면 다시 한번 대상 고객이 적절한지, 고객은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지, 우리가 그 불편을 해결할 수 있는지 점검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sungjucho@ka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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