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극적 고통(passive suffering)’.
스페인 나바라 항소법원이 5명의 남성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10대 여성의 고통을 표현한 말이다.
법원은 여성이 겪었을 ‘소극적 고통’을 근거로 가해 남성들에 ‘강간죄’가 아닌 형량이 가벼운 ‘성적 학대죄’를 적용했다.
항소법원은 피해 여성이 성행위에 동의하지 않은 점, 5명의 남성은 성범죄를 저지르려고 우월한 지위와 환경을 이용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명백히 우월한 상황을 남용하는 것이 그 자체로 협박과 폭력적인 행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원심을 유지했다고 영국 BBC 방송과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이번 재판은 2016년 7월 북부 도시 팜플로나의 소몰이축제 기간에 이 남성들이 당시 18세 여성에게 성폭력을 가한 사건에 대한 항소심이다. 가해 남성들은 휴대전화로 범행 장면을 찍어 메신저인 왓츠앱에 ‘늑대떼’라는 타이틀을 달아 대화방에 올리며 자랑하기도 했다. 원심에서 징역 9년을 선고받은 이들은 2개월 뒤 보석금을 내고 풀려나면서 스페인 전역에서 수만 명의 여성이 시위하는 등 지탄의 대상이 됐다.
스페인 형사법에서 강간죄는 폭력과 위협이 있어야 성립된다. 원심법원은 성폭력 당시 남성들이 촬영한 동영상을 근거로 사건 당시 피해자가 수동적인 태도로 내내 눈을 감은 채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원심 판결 이후 가부장적인 문화로 사법부가 성폭력에 관대하다는 여론과 함께 시위가 거세게 일자 스페인 정부는 형사법 조항을 다시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우리나라 형법에서도 강간죄의 기준은 피해자에게 유독 가혹하다. 선진국에서는 피해자의 동의 내지 적극적 동의 부재 여부를 강간 기준으로 삼는 반면, 우리 형법 297조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를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에 우리나라 정치권과 여성계에서는 ‘비동의 강간죄 신설’을 적극적으로 요구해왔다. 박상기 법무부장관은 지난 10월 국회에서 열린 대정부질문에서 “우리의 성폭력 판단기준이 심각한 폭행과 협박이 있는지에 기준을 둔 최협의설(강간죄 등의 범위를 최대한 좁게 해석한다는 뜻)을 따르고 있어 (피해자들이) 목숨을 걸고 저항하기를 요구받고, 피해 후에는 모든 삶이 파괴된 피해자의 모습을 강요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박 장관은 정치권과 여성계에서 요구해온 ‘비동의 강간죄 신설’ 취지에 공감하면서도 구성 요건과 입증 책임과 관련한 문제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정선은 인턴기자 jsezz@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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