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국내 A기업의 사례다. 이 기업은 2015년 캄보디아 소재 B은행에 맡겨둔 해외 금융계좌 잔액 380억원을 세무서에 신고하지 않았다. 국제조세조정법에 따르면 해외 금융계좌에 5억원 이상을 보유하고 있는 국내 법인은 관할 세무서에 보유자의 신원과 계좌 정보를 신고해야 한다. 이를 어겨 신고의무 위반금액이 50억원을 초과하는 경우 2년 이하 징역 또는 신고의무 위반금액의 20%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돼 있다. 하지만 서울지법 모 판사는 법적인 벌금 상한인 76억원(380억원의 20%)보다 턱없이 적은 1,000만원 벌금형만 선고했다. 이 판사는 “신고하지 않은 해외 금융계좌 잔액이 380억여원에 달해 사안이 중하다”면서도 “피고인이 범행을 인정하는 등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고 같은 유형의 전과가 없으며 추후에 신고를 마쳤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2. 서울 강남구의 한 안과병원장 C씨는 환자의 백내장 수술을 하루 만에 끝냈지만 이틀에 걸쳐 수술한 것으로 허위 진단서를 작성했다. 국민건강보험 급여를 부풀려 받기 위해서다. 환자도 이를 근거로 보험사로부터 보험금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었다. C씨는 이러한 수법으로 환자 54명에게 허위 진단서를 발급하고 4,000만원가량의 건강보험 급여를 챙겼다. C씨를 둘러싼 혐의는 사기와 사기방조, 의료법 위반, 허위 진단서 작성 등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1월 C씨에게 내려진 판결은 벌금 1,500만원. 선고 당시 징역형을 예상했던 손해보험 업계는 “가벼운 형벌이 오히려 보험사기를 부추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벌금형에 그친 C씨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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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6년 9월 보험사기방지 특별법 시행으로 보험사기에 대한 벌금이 2,000만원 이하에서 5,000만원 이하로 강화됐다. 하지만 보험사기 적발금액은 2016년 7,185억원에서 지난해 7,302억원으로 오히려 늘어 최고치를 다시 갈아치웠다. 특별법 시행 이후 보험 범죄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커지면서 징역형에 처해지는 사례가 많아졌지만 여전히 벌금형 비중이 높은 터라 범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앞서 2013년 금융감독원 조사에서 보험 범죄자 796명에게 내려진 형벌을 보면 벌금형이 574명으로 전체의 72.1%를 차지했다. 집행유예는 17.3%(138명)였고 징역형은 10.6%(84명)에 불과했다. 손해보험협회의 한 관계자는 “최근 보험사기범에게 징역형이 내려지는 판결이 많아졌지만 1심에서 징역형을 나오더라도 2심이나 3심에서 벌금형으로 형벌이 낮아지는 사례도 많다”면서 “아직도 보험사기에 대한 형벌은 벌금 위주로 내려지고 있어 보험사기가 끊이지 않는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가벼운 벌금형이 범죄를 부추긴다는 지적은 몰카 범죄에도 꾸준히 제기돼왔다. 여성변호사회가 2011년부터 2016년 6월까지 서울 지역 법원에서 몰카 범죄에 선고한 형벌을 살펴본 바에 따르면 벌금형은 전체의 72.0%(1,109건)에 이른다. 이어 집행유예 14.7%(226건), 선고유예 7.4%(115건) 등이었으며 징역형은 5.3%(82건)에 그쳤다. 벌금 형량도 200만원 26.6%(295건), 300만원 22.0%(244건), 100만원 15.1%(167건) 등으로 300만원 이하가 80.0%에 달했다.
실제로 올해 4월 울산지방법원이 해수욕장에서 비키니 차림 여성들을 휴대폰으로 몰래 촬영한 D씨에게 내린 형벌은 벌금 100만원이었다. 이찬희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은 “법 체계가 사회 변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면서 벌금이 범죄를 억제하지 못하고 국민 정서와도 동떨어지는 문제를 낳고 있다”고 진단했다. /특별취재반=탐사기획팀 (안의식팀장 정두환선임기자 김상용기자 이지윤기자. 사회부 법조팀(김성수선임기자 안현덕기자 윤경환기자) miracl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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