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도 예산안을 둘러싼 논란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예산의 전체적인 규모나 수지만 놓고 보자면 내년도 재정은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슈퍼 예산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여타 선진국들에 비해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 예산의 규모가 작은 편이며, 관리재정수지가 GDP 1~2% 규모의 적자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이 또한 장기적으로 GDP 대비 정부부채 비율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무리가 없는 수준이다. 특히 경기가 둔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적절한 규모의 재정 적자는 오히려 바람직하다고도 할 수 있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우리나라의 장기 재정 전망이 밝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제의 중심에는 인구 고령화에 따른 사회보장 비용의 급격한 증대가 있다. 우리나라 사회보험제도의 양대 축이라 할 수 있는 국민연금과 건강보험의 경우 아직은 흑자를 유지하고 있으나 조만간 적자로 전환돼 각각 오는 2057년과 2027년에는 기금 고갈에 처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보험 재정의 악화는 결국 어떤 식으로든 국고 부담을 높이게 될 것이므로 장기적으로 정부의 재정건전성을 훼손시키는 작용을 할 수밖에 없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사회보험제도의 재정 안정을 위해 ‘그때그때’ 보험료와 급여액을 조정하는 방식으로 대응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국민들의 반발만 높이고 근본적으로 연금 및 보험 재정의 안정을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 이유는 이러한 접근 방식이 문제 해결을 뒤로 미루기만 하는 임시방편적 성격을 띠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향후 우리나라 사회보험제도의 성공적인 개혁을 위해서는 먼저 제도의 운영방향과 재정목표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노력이 선행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명시적인 재정목표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재정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구체적 개선안의 도출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보다 인구 고령화 및 재정 악화가 훨씬 더 진전된 일본의 공적연금제도 개정 사례를 보면 보험료율과 급여액의 구체적 조정안을 논의하기에 앞서 일단 100년 이후에도 1 이상의 적립배율(연금 적립금의 규모/1년 치 연금 급여액의 비율)을 유지한다는 재정목표를 명확히 했으며 아울러 보험료율의 상한 및 소득대체율의 하한과 같은 주요 대전제들에 대한 합의를 도출했다. 즉 공적연금제도가 노후소득 보장이라는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면서 장기적 지속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필요조건들을 설정하는 것부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사회보험제도에 대해 일종의 재정준칙을 도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재정준칙에 대한 합의가 이뤄진다면 그 이후의 구체적인 조정안들에 대해서는 정치적 반발의 여지가 줄어들 수 있다. 일본의 경우 보험료율에 대한 상한하에서 적립배율 1배 유지라는 재정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거시경제 슬라이드’라고 하는 자동 재정 안정화 장치를 도입했다. 거시경제 슬라이드는 연금급여의 수준을 조정함에 있어 임금상승률이나 물가상승률 외에 평균 수명의 상승이나 성장률의 하락과 같은 다양한 거시경제적 요인들을 체계적으로 반영하는 조치다. 따라서 거시경제 슬라이드하에서는 빈번한 제도의 개정 없이도 미리 정해진 준칙에 따라 신축적으로 급여 수준의 조정이 이뤄지게 돼 연금 재정의 균형이 자동적으로 보장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은 우리나라의 사회보험제도 개정에 대해서도 유용한 시사점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재정준칙의 도입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재정준칙의 도입 자체가 정부에는 여전히 어려운 과제일 수 있으며 현실적으로 국고 보조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증세에 대한 합의도 더불어 이뤄질 필요가 있다. 실제로 일본의 경우를 보더라도 경기침체하에서 거시경제 슬라이드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소비세 인상 또한 몇 차례 연기되는 등 사회보험제도의 개혁 과정이 매우 험난함을 알 수 있다. 일본의 GDP 대비 정부부채 규모는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 수준으로 200%를 상회한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한 노력을 시작하기에는 지금도 이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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