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만난 재계의 한 고위 관계자가 “문재인 정부는 대기업을 적대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문재인 정부가 박근혜 정부와 결탁한 대기업을 적폐세력으로 몰고 재벌개혁과 규제를 통해 다그친다는 것이 그간 재계의 논리가 아니었나.
하지만 이 관계자는 “정확히 말해 무관심이라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기업이 지금 고민하고 있는 것과 각 기업이 처한 지배구조상의 갈등과 글로벌 현장에서 몰아친 팍팍한 현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설명이 뒤를 이었다. 이 관계자는 “정부 정책에 대해 협의하고 의견을 주고받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라며 “‘각자 알아서 살자’ 하는 막연한 생각들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청와대 참모들의 생각은 어떨까. 청와대의 한 고위 관계자는 기자에게 “기업인들 기 살려달라고 하는데 도대체 뭘 해달라는 건지 답답하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기업인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우리 송년회 할 때 한번 와주십시오’ 하더라. 그런 스킨십이 부족했다면 그런 점도 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또 다른 청와대 관계자는 재계가 느끼는 서운함과 관련해 “지난 1980년대 과외금지 조치 후 과외 선생님이 사라진 학생을 보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의 탄생 과정을 돌이켜 보면 청와대와 재계의 관계는 서먹할 수밖에 없다. ‘정경유착’은 모두가 갖고 있는 불편하고 부끄러운 기억이다. 청와대 참모들 사이에서는 재계와 일말의 오해도 남기고 싶지 않다는 결벽증도 엿보인다. 재계 역시 권력의 입만 바라보던 속성을 여전히 버리지 못한 듯하다.
하지만 과거의 악연을 이유로 청와대와 재계가 서로 ‘소 닭 보듯’ 쳐다보는 현실에는 한숨이 나온다. 미중 무역마찰, 제조업의 위기, 신산업 부재 등 우리 경제의 구조적 문제는 이미 대기업들이 경영 현장에서 치열하게 부딪히고 있는 일상이다. 청와대는 경제의 ‘구조적 위기’를 그토록 강조하면서 어디에서 어떻게 위기가 왔는지 정확히 들어본 적이 있는지 의문이다.
독서광인 문 대통령의 독서 목록에서 기업과 미래에 관련한 저서가 눈에 잘 띄지 않는 것도 아쉽다. 대통령의 독서는 곧 정치적 메시지다. 역시 독서광으로 유명했던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은 휴가 중 ‘지식자본주의혁명’ ‘미래와의 대화’ ‘비전 2010 한국경제’를 읽었다고 한다. 문 대통령의 지난 휴가철 독서 목록에는 ‘평양의 시간은 서울의 시간과 함께 흐른다’ ‘소년이 온다’ ‘국수’ 등이 담겼다.
문 대통령은 10일 임명된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에게 “기업의 투자 의욕이 떨어지고 있다”며 기업 애로 해소를 숙제로 던졌다. 청와대는 이에 앞서 대통령이 특별한 주문을 할 것이라고 기대감을 높였다. 하지만 기업과 소통하고 투자 해결책을 찾으라는 것이 왜 ‘특별 주문’씩이나 돼야 할까. 너무나 당연하고 일상적인 지시를 특별 주문이라고 강조하는 청와대에 우리의 경제 현실이 정확히 투영돼 있다.
/seoulbird@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