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초 서독에서 전에 잘 쓰지 않았던 단어가 어느 틈엔가 대중에게 회자되기 시작했다. 독일 남부의 극히 일부 지역에서만 쓰던 사투리 ‘aufmupfig’가 그 주인공. 우리말로 ‘반항적’이라는 뜻의 이 단어는 1960~1970년대 중반 서독을 뒤흔들었던 학생운동의 흐름을 타고 순식간에 사회 전반으로 퍼져 나갔다. 독일언어학회조차 “갑자기 나타나 대중을 정복해버렸다. 놀라운 일”이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인용 사례가 급속히 늘어나자 독일언어학회는 사전 기재를 공식화하고 1971년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올해의 단어’라는 타이틀을 부여했다.
‘올해의 단어’는 단순히 사용 빈도수가 높다고 선정되는 것이 아니다. 정치·경제·사회적 함의와 영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미국방언협회(ADS)가 1990년 선정한 ‘부시입술(bushlips)’은 조지 H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대선 당시 “내 입술을 보세요. 새로운 세금은 더 이상 없습니다”라고 공약했으면서도 당선 후 재정적자 해소를 위해 세금 인상을 추진한 것을 비꼬는 말이었다. 2016년과 2017년 ADS와 콜린스·맥과이어사전 등이 ‘가짜뉴스(fake news)’에 주목한 것 역시 진실을 무력화하고 여론을 왜곡하려는 시도에 경종을 울리기 위함이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행사가 존재한다. 교수들이 선정하는 ‘올해의 사자성어’가 그것. 올해의 단어와 차이점이 있다면 시사적인 성격이 훨씬 강하다는 것이다. 2001년의 ‘오리무중(五里霧中)’은 9·11사태라는 폭력과 테러로 얼룩진 국제정세, 청와대와 정관계-벤처기업인들이 연루된 각종 게이트가 끊이지 않는 암울한 국내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어두운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사악한 것을 부수고 사고를 바르게 한다는 뜻의 ‘파사현정(破邪顯正)’은 나라를 바로 세우고 국민을 평안하게 해달라는 염원을 담고 있었다.
또 올해의 단어와 사자성어를 마주할 때가 왔다. 미국의 온라인 사전 메리엄-웹스터는 올해의 단어로 ‘정의(justice)’를 꼽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각종 스캔들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옥스퍼드사전과 딕셔너리닷컴도 각각 ‘유해한(toxic)’과 ‘오보(misinformation)’를 선정했다. 모두 썩 유쾌해 보이지 않는다. 우리에게 올해의 단어를 선택할 기회가 주어지면 어떤 것을 고를까. 희망의 미소일까 절망의 탄식일까./송영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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