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칠곡에서 청송으로 가는 길에 눈이 흩날렸다. 눈발이 굵지 않아 설경을 볼 횡재수는 기대하지 않았다. 청송으로 접어들어서는 내리던 눈도 그쳤다. 그런데 청송군의 초입인 삼자현(三者峴)에 이르자 고개는 온통 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고개를 넘다가 여러 차례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었다. 산에는 청송(靑松)이라는 고장 이름처럼 온통 푸른 소나무들이 하늘을 찌르고 서 있었다. 짙푸른 솔숲이 하얗게 뒤집어쓴 눈은 장관이었다.
고려 시대 ‘천벌이(현 청송군 현동면) 관문’에서 청송으로 가려면 반드시 넘어야 하는 고개가 삼자현으로, 높고 험한데다 산짐승이나 도둑들이 출몰했다. 나그네들은 고개 아래에서 길동무를 만들어 함께 넘어가고는 했다. 그래서 이 고장 사람들은 이 고개를 세 사람은 모여야 넘어갈 수 있다는 의미로 ‘서넘재’ 혹은 ‘서넘티’라고 불렀다. 훗날 서넘재라는 고개 이름은 한자어로 바뀌어 삼자현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삼자현은 6·25전쟁 중 북한군이 은신할 정도로 숲이 깊었다. 하지만 산골짜기 삼자현도 산업화의 바람은 피해갈 수 없었다. 대낮에도 어두컴컴하던 산길의 나무들은 잘려나가고 그 위로 도로가 닦여 이제 삼자현은 차들이 쌩쌩 달리는 고갯길로 변모했다.
청송에는 여러 가지 볼 것이 많지만 사진 좀 찍는다는 이들에게 주산지(注山池)는 단연 최고의 촬영 포인트다. 맑은 날의 반영과 새벽의 물안개가 좋아 봄·가을에는 사진작가들로 미어터질 정도인데 겨울 풍경은 본 적이 없어 동트기 전에 숙소를 나섰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눈 쌓인 길을 더듬어 주산지로 향했다. 겨우 20분 정도 걸었을 뿐인데 볼이 떨어져 나가는 듯했다. 얼어붙은 비탈길을 조심조심 더듬어 올라 도착한 주산지는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장갑을 끼고 있는데도 손이 시렸다. 해 뜨기를 기다려 사진촬영을 끝내고 차로 돌아와 시동을 거니 모니터 액정에 외부 온도는 영하 12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주산지는 1720년 8월 조선 경종 원년에 착공해 이듬해 10월 준공한 저수지다. 길이 200m, 평균 수심이 약 8m인 주산지는 조성된 후 지금까지 아무리 오랜 가뭄에도 밑바닥을 드러낸 적이 없다. 주산지는 화산재가 엉겨붙어 만들어진 용결 응회암이라는 치밀하고 단단한 암석이 아래에 깔려 있고 그 위로 비용결 응회암과 퇴적암이 쌓여 그릇과 같은 지형을 이루고 있다. 비가 오면 비용결 응회암과 퇴적암층에서 스펀지처럼 물을 머금고 있다가 조금씩 물을 흘려보내는 것이 물이 마르지 않는 이유다. 2013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105호로 지정됐다. 경상북도 청송군 부동면 이전리 73.
청송에는 여러 번 와봤지만 심수관 도예 전시관은 번번이 지나쳤다. 그래서 이번에는 작심하고 들러 보기로 했다. 심수관 도예 전시관이 청송에 세워진 것은 1598년 일본 사쓰마(가고시마)의 번주(藩主)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끌려간 심당길이 청송 심씨이기 때문이다. 심당길은 사쓰마 번주에게 녹봉을 받는 대가로 도자기를 구워 바쳤다. 기술은 후대에 전해졌고 12대손(1835~1906년)인 심수관은 1873년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대화병을 출품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후 심수관의 후손들은 그의 이름을 이어받아 ‘OO대 심수관’이라는 식으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전시관에 있는 작품들은 12~15대 심수관의 주요 작품들로 투각·부조·금채 등 심수관 가문의 현란한 도예기법을 감상할 수 있다. 금색유약 및 정교한 기법에서는 일본 특유의 화려함이 연상되지만 옹기와 같은 투박한 구로사쓰마 자기는 우리나라의 것과 흡사해 한 뿌리에서 출발한 것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금란수(긴란데)라고 불리는 기법은 백자를 구워낸 후 유약을 바른 표면 위에 금으로 다양한 문양을 표현하는 기법이다. 심수관은 금란수를 오스트리아의 빈과 프랑스 파리 박람회에 출품해 온 천하에 사쓰마 도자기를 각인시켰다. 현재 심수관은 15대로 와세다대를 졸업한 후 교토에서 도예기술을 배웠으며 이탈리아 파엔차 국립미술 도예학교에 유학했고 한국에서 김치 옹기 제작기법을 배우기도 했다. 그는 금수(錦手, 적·녹·황·청 등 투명유약으로 덧그림을 그려넣는 기법)와 투각 등 심수관 집안의 전통적인 기술과 표현에 능한데 그 기법의 정밀함은 보는 이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다. /글·사진(청송)=우현석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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