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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 언어정담] 겨울의 한가운데서, 찬란하게 피어나는 봄을 꿈꾸며

작가

달콤한 핫초코·소복히 쌓인 눈…

겨울만의 즐거움이 한둘이랴

한파가 맵고 혹독했던 만큼

봄은 눈부시고 향기로울 것





겨울의 입구에서 감기몸살이나 독감을 앓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심한 감기몸살에 걸려 한동안 맥을 못 추다가 갑자기 ‘따스하고 싱그러운 봄을 그려낸 그림’을 찾아보고 싶어졌다. 봄기운이 완연한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 같은 그림을 보면 반짝 기운을 차릴 것 같았다.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를 인터넷에서 찾아보다가 예전과는 뭔가 다른 느낌을 발견했다. 눈부신 기적처럼 피어오르는 봄의 이미지를 화려하게 형상화한 이 그림 속에 ‘완연한 봄’보다는 ‘아직은 겨울’의 흔적이 꽤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프리마베라’의 전체적인 바탕색은 거의 검은색에 가깝다. 배경색만 보면 ‘봄’이라는 느낌보다는 칠흑 같은 암흑, 혹독한 겨울의 느낌이 더 짙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 그림의 전체적인 느낌은 싱그러운 약동과 생생한 활기로 가득하다. 꽃의 여신 플로라가 치맛자락 가득 알록달록한 봄꽃들을 품어 안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얼른 버선발로 뛰어 나가서 플로라가 흩뿌리는 꽃잎들을 받아 주어야 할 것만 같다. 마음이 울적할 때 ‘프리마베라’ 같은 그림을 보면 ‘색채의 언어’가 전해주는 오색찬란한 마력으로 문득 기운을 차리곤 한다.

강력한 한파에 몸을 움츠리게 되는 요즘이지만, 겨울의 추위를 무조건 피하려고 하기보다는 겨울이 지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예전에는 겨울의 아름다움을 잘 느끼지 못했다. 영화나 그림 속의 아득한 설경이 아름답다고 느낀 적은 있지만, 막상 우리가 걷는 도로에 눈이 쌓이면 넘어지거나 다칠까봐 전전긍긍하느라 눈 쌓인 풍경의 소복한 아름다움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이제는 추운 겨울이 있어서 비로소 더욱 아름답고, 향기롭고, 사랑스러운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단팥이 듬뿍 들어간 황금붕어빵은 추운 겨울에 먹어야 제맛이고, 달콤한 핫초코나 따끈따끈한 군고구마도 겨울 한파 속에서 먹어야 더욱 꿀맛이다. 모지스 할머니가 그린 ‘우리는 스케이트를 사랑해요 We love to skate’라는 그림을 보고 있으면 ‘진정한 겨울의 행복이란 이런 것이지’하는 생각이 든다. 얼음이 꽁꽁 얼어 단단해진 빙판 위에서, 새하얀 설경을 배경으로 마음껏 얼음을 지치는 아이들의 신나는 스케이팅을 바라보는 것. 오직 겨울에만 할 수 있는 것들, 겨울에만 즐길 수 있는 스포츠 등을 생각해 보면, 추운 겨울이 야속하거나 힘겹지만은 않다. 오직 겨울이기에 가능한 것들을 떠올리다 보면, 겨울이기에 비로소 느낄 수 있는 따스한 이불이나 목도리의 감촉 하나하나가 소중해진다.





겨울에 읽으면 더욱 애틋하고 감동적인 시도 있다. 김태정 시인의 ‘겨울산’을 소리 내어 읽어 본다. “풍성했던 열애가 가고/이제 우린 겨울산이다/마침내 헐벗은 사랑이다/추운 애인아/누더기라도 벗어주랴/목도리라도 둘러주랴” “쌀 한줌 두부 한모 사들고 돌아오는 저녁/내 야트막한 골목길에 멈춰서서 바라보면/배고픈 애인아/따뜻한 저녁 한끼 지어주랴/너도 삶이 만만치 않았으리니/내 슬픔에 네가 기대어/네 고독에 내가 기대어/겨울을 살자/이 겨울을 살자” 불꽃처럼 타오르던 연애 감정은 사라졌을지라도, 이제 ‘사랑의 겨울’이 온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도, 남아 있는 또 하나의 사랑. 그것은 바로 이런 겨울의 사랑, 불타오르는 열정보다는 애틋한 연민에 가까운 사랑 아닐까. 추운 애인을 바라보며 누더기라도 벗어주고 싶은 마음, 배고픈 애인에게 따스한 저녁 한 끼 지어주고 싶은 마음, 나의 슬픔에 너를 기대게 하고, 너의 고독에 내가 기대어 앉아, 이 추운 겨울을 버티고 싶은 마음. 겨울이라 더욱 안타깝고 쓸쓸한 어느 저녁, 가만히 ‘겨울산’을 소리내어 읽어보면 아름다운 시어가 지닌, 세상에서 가장 포근한 담요보다 더욱 따스한 문학의 힘을 절로 느끼게 된다.

오래오래 천천히 타오르는 화로 같은 김태정 시인의 아름다운 시를 읽고 나서 다시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를 바라본다. 그렇구나. 겨울의 끝자락이 아직 남아 있기에 오히려 봄의 시작이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다. 이 그림을 바라보면, 마치 아직 끝나지 않은 겨울의 장막을 뚫고 오렌지빛 꽃들과 연두빛 잎사귀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화면 바깥으로 뛰쳐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이 그림은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듯하다. 아무리 추운 겨울일지라도 언젠가는 ‘봄이 온다’고. 그러니 어깨를 펴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겨울의 추위마저 한껏 보듬어 안자고. 우리가 힘겹게 견디는 겨울이 있기에, 다가올 봄은 더욱 찬란하고 향기로울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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