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로라하는 세계 유명 화가의 작품이 들어가고 독창적인 디자인이 돋보이는 달력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이다. 특히 최근에는 단순히 심미적인 가치를 품은 생활필수품을 넘어 이미 해를 넘긴 제품들이 중고 시장에서 활발한 거래를 보이면서 달력의 활용도는 나날이 높아지는 모습이다.
지난 1980~1990년대 가수나 영화배우 등의 스타 사진을 담는 게 전부였던 달력 디자인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대기업들이었다. 우선 삼성그룹은 1995년부터 2015년까지 해마다 한 개당 약 10만원의 제작비가 들어가는 ‘VIP용 달력’을 제작해 배포했다. 1995년 김환기 작품을 시작으로 앙리 마티스, 파울 클레, 빈센트 반 고흐, 클로드 모네, 마르크 샤갈, 파블로 피카소, 로이 릭턴스타인 등의 명화를 담은 달력이 줄줄이 만들어졌다. 외부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해 작가를 선정하고 매년 한정판으로 제작해 VIP에게 선물한 삼성 달력은 일반 용지보다 20배 정도 비싼 프랑스산 고급 판화 용지를 사용하면서 제품의 품격을 높였다. 삼성은 2016년부터 예산 절감과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시행 등을 이유로 제작을 중단했지만 철 지난 달력들은 여전히 중고품 사이트에서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다. 실제로 한 포털 사이트의 블로그에는 지난달 29일 풍속화를 기본 콘셉트로 한 2015년도 삼성 VIP용 달력을 5만원에 판매한다는 게시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삼성문화재단의 한 관계자는 “앤디 워홀과 천경자·이우환 등의 작품이 얹힌 달력들이 특히 인기가 많다”며 “해를 넘겨 이미 실용성을 잃은 달력들에 대한 수요가 이어진다는 것은 거래 당사자들이 삼성의 달력을 일종의 예술품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얘기”라고 설명했다.
SK그룹도 예술성이 탁월한 한정판 달력을 꾸준히 제작해오고 있는 대기업 중 하나다. 삼성과 마찬가지로 20여년 전부터 VIP용 달력을 배포하기 시작한 SK그룹은 올 한해만 내부 사정으로 제작을 거른 뒤 2019년도 달력은 다시 만들었다. SK는 2014년까지 그룹이 운영하는 ‘아트센터 나비’에서 달력 제작을 맡았다가 그 이후부터 사회적 기업인 ‘행복나래’로 관련 업무를 넘긴 상태다. 재계 관계자는 “기업들이 만든 물건이 ‘달력의 명품화’를 선도하기도 했지만 반대로 소수 한정판으로 제작된 기품 있는 달력이 기업의 이미지를 제고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한정판 달력에 대한 열풍은 정치권으로도 확산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해 취임한 문재인 대통령이다. 문 대통령의 팬 카페인 ‘젠틀 재인’은 지난해 대통령의 캐릭터와 사진이 박힌 달력을 500부 내외로 제작해 공동구매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탄핵 정국을 거치며 ‘촛불 시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문 대통령의 높은 인기를 반영하듯 1차 예약 판매에서만 1만명이 몰렸다. 이에 따라 젠틀 재인은 다음 카카오의 펀딩을 받아 제작비를 충당한 뒤 수익금 전액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부했으며 예상을 뛰어넘는 호응에 힘입어 카페 운영진은 2019년도 달력도 최근 출시했다. /나윤석·조상인기자 nagija@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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