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은 누군가의 ‘하달’에 따른 것이 아니라 민초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일어난 혁명입니다. 새해 3·1운동 100주년도 시민들이 손님이 아니라 주인이 돼야 마땅하지요.”
말투에서 단호함이 묻어난다. 3·1운동이 아닌 ‘3·1혁명’임을 주장하는 대목에는 결기가 배어 있다. 평범한 직장인의 얼굴은 역사책 기억 속의 한 인물의 모습과 묘하게 겹친다. ‘3·1운동 100주년 서울시기념사업’ 시민위원회 단장인 김용만(33)씨.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인 백범 김구 선생의 증손자다. 12월 말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김구기념관에서 만난 그는 “100년 전 위대한 사건을 시민들이 주체가 돼 기억하고 기리는 것은 당연하다”며 “3·1절에 맞춰 시민 참여를 최대로 이끌어내는 의미 있는 행사를 준비할 것”이라고 말했다.
시민위원회는 2019년 서울시의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을 관이 아닌 민 주도로 하자는 취지에서 지난 2017년 시민 310명으로 꾸려졌다. 10대의 어린 학생부터 70대의 독립유공단체 회원 어르신까지 다양하다. 이들은 서울시가 벌이는 독립운동 기념시설 조성, 시민참여 행사·교육 등 12개 사업을 함께 기획하고 진행한다.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독립운동가 80명의 얼굴과 어록을 새겨놓은 안국역 테마 역사 사업이 대표적이다.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문을 읽은 옛 ‘태화관’터에도 ‘3·1독립선언 광장’을 2019년까지 만들기로 했다.
김 단장은 “시민의 일상과 동떨어진 기념사업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며 “3·1운동이 단순한 만세운동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3·1운동을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며 정명(正名)을 주장했다. 김 단장은 “당시 연인원 220만명이 시위에 참여해 2만여명의 사상자를 낸 역사적 사건을 운동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며 “왕정시대를 끝내고 공화정으로, 봉건국가에서 근대국가로 우리나라의 근본을 바꿨다는 점에서 혁명으로 불려야 옳다”고 말했다.
김 단장은 광복절 등 국가 기념행사에서 빠지지 않는 유명인사지만 서울시의 단장직을 요청받았을 때는 부담감으로 처음에는 고사했다. “사회초년병으로 경험도 미천한 터라 그 자리를 피하려고 했지만 ‘소명의식을 가지라’는 지인들의 꾸짖음에 정신 차리고 마음을 고쳐먹었지요.” 증조부의 존재는 거대한 산이었지만 그만큼 압박감도 컸다. 김 단장의 조부는 백범의 둘째 아들인 고(故) 김신 전 공군참모총장이며 부친은 김양 전 국가보훈처장이다. 그는 “나태나 나약은 절대 허용되지 않는 가풍에서 자랐다”며 “초등학생 때 매일 할아버지의 새벽 운동을 따라 나서며 울상이었던 기억이 난다”고 술회했다.
그는 미국 조지워싱턴대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지만 영주권 신청은 하지 않았다. 2010년 귀국 후 공군 장교 복무를 마치고 2014년 경기 판교에 있는 방산 업체 LIG넥스원에 입사했다. 그는 “국가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방산 업체를 선택했다”며 “단장직을 맡았을 때도 회사가 흔쾌히 동의하고 응원해줘 직장과 단장직을 병행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취업난 등 시급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청년들에게는 무작정 역사인식 정립을 요구할 수 없는 분위기다. 김 단장이 제안하는 해법은 일상에서 역사를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다. 그는 “클래식 음악 단체가 백범의 발자취를 따라 전국을 돌며 공연하는 ‘김구 로드프로젝트’처럼 예술로 시민들의 관심을 이끌 필요가 있다”며 “예술과 역사를 접목해 시민들에게 다가가는 사업들을 추진해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독립유공자 처우와 관련해 재정 지원의 한계점을 인정하면서 “공익광고 등으로 국가를 위해 희생한 분들과 그의 후손이 자부심과 긍지를 갖도록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글·사진=박현욱기자 hwpar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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