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기해년은 연극 팬들에게 설레는 한 해다. 지금부터 할 일은 신년 달력이나 다이어리를 펼쳐 들고 손에 가장 익숙한 펜을 쥐는 것이다. 보고 싶은 연극이 언제 막을 올리고 언제 맺음 하는지 꼼꼼하게 적어두지 않으면 주옥같은 명작들을 놓치고 또 다시 최소 2~3년을 기다려야 한다. 올해가 아니면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작품도 있다. 정말이다.
추측해보건대 가장 많은 이들이 이미 달력에 표시해뒀을 법한 작품은 기해년의 화려한 시작을 선포해줄 ‘레드’와 ‘오이디푸스’다. 2010년 토니상을 휩쓸다시피 한 연극 ‘레드’는 재연 무대마저도 손꼽아 기다린 이들이 많다. 색면추상의 대가로 알려진 화가 ‘마크 로스코’와 그의 조수 ‘켄’과의 대화로 구성된 2인극 형식인데 강신일과 정보석이 마크 로스코역에 더블 캐스팅되며 더욱 화제다.
같은 달 말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배우 황정민의 연극무대가 예정돼 있다. 10년만의 연극 무대 복귀작이었던 ‘리처드 3세’에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연기력이 무엇인지 재정의했던 그가 이번에 준비한 무대는 역시 셰익스피어 원작의 ‘오이디푸스’. 이번 무대 역시 서재형 연출이 맡아 영리한 재해석과 함께 시각적으로도 즐거운 무대를 보여줄 예정이다.
날이면 날마다 볼 수 없는 내한 공연들도 연극팬들을 설레게 한다. ‘달의 저편’으로 시처럼 아름다운 무대를 보여줬던 캐나다 출신 유명 연출가 로베르 르빠주는 5월 ‘887’로 다시 한국팬들을 찾는다. 르빠주의 자전적 이야기에 뿌리를 둔 작품으로 특히 이번 무대는 연출뿐만 아니라 배우로도 활약할 예정이다.
세계적으로 가장 주목받는 연출가로 꼽히는 벨기에 연출가 이보 반 호브도 ‘파운틴헤드’ 이후 2년만에 돌아온다. 이번에 선보일 무대는 ‘코리올레이너스’ ‘줄리어스 시저’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등 셰익스피어 희곡 3편을 연이어 구성한 ‘로마 비극’으로 아시아 초연인 동시에 전 세계에서 선보일 마지막 무대다. 러닝 타임만 5시간 30분에 달하는 이 작품은 무대와 객석, 극장 로비를 자유롭게 오가며 즐길 수 있는 공연으로 색다른 관극 체험을 예고하고 있다.
9월에는 135년 전통을 지닌 독일 명문극단 도이체스 테아터와 훔볼트 재단이 2년간 리서치해 만든 ‘렛 뎀 잇 머니’(Let Them Eat Money)가 공연된다. 독일의 저명한 영화감독이자 연출가 안드레스 바이엘이 쓰고 연출한 이 작품은 경제, 사회, 환경 등 다양한 분야 학자, 전문가 그리고 일반 시민들과의 리서치와 토론 등을 통한 ‘참여형 제작 방식’으로 탄생했다. 2028년 근미래에서 시작해 유로존 붕괴와 난민 대이동, 로봇에 의한 노동력 대체, 데이터 통제 사회와 민주주의 위기 등 다양한 문제를 톺아보는 문제작이다.
세계 명작을 국내 대표 연출가들의 독창적 시선으로 재해석한 무대도 잇따른다. 이-팔 평화협정을 다룬 ‘오슬로’로 지난해 국립극단 신작 기준 최다 관객 동원에 이어 대한민국연극대상 대상 등 주요 연극상을 휩쓸었던 이성열 예술감독은 생애 첫 베르톨트 브레히트 연극에 도전한다. 그가 선보일 작품은 국내에선 브레히트 작품 가운데서도 다소 생소한 ‘갈릴레이의 생애’다. 구시대의 가치와 새로운 가치가 충돌하는 상황을 다룬 이 작품을 통해 신구 가치의 충돌로 갈등이 첨예한 한국 사회에 또 한 번 시사점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또 5월에는 ‘고도를 기다리며’ 한국 초연 50년(1969년 초연)을 맞아 임영웅 연출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산울림극장 밖 명동예술극장을 찾는다. 12월에는 셰익스피어의 대표 희곡 ‘한여름밤의 꿈’이 문삼화 연출의 손에서 재탄생한다.
해외 문제작을 국내 연출의 시선으로 해체하는 무대도 마련된다. 김민정 연출의 섬세하고 감각적인 연출로 재탄생할 ‘인형의 집, Part.2’는 우리가 기존에 알던 ‘인형의 집’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작가 중 한 명인 루카스 네이스의 화제작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집을 나갔던 노라가 15년 만에 돌아오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지난해 토니 어워드 8개 부문 후보에 올랐던 브로드웨이 히트작이기도 하다.
6월에는 영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니나 레인의 최신작 ‘콘센트-동의’가 관객을 찾는다. 젠더 감수성과 위계 폭력 문제를 다양한 관점으로 보여주는 문제작으로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을 통해 뛰어난 연출력을 입증한 강량원 연출이 독창적 무대를 선보인다.
올해 연극 라인업 가운데선 리딩 공연, 쇼케이스 등으로 이미 관객들의 기대를 한껏 높여놓은 작품들도 눈에 띈다. ‘고독한 목욕’은 국립극단의 창작희곡 온라인 상시 투고 제도인 ‘희곡우체통’을 통해 발굴한 창작 신작으로 오는 3월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관객과 만난다.
‘완벽한 리딩 공연’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이갈리아의 딸들’도 완성된 무대로 돌아온다. 시의성 있는 주제라는 장점에도 생소한 용어와 배경 설정, 반전 가득한 스토리 전개 등의 난제를 김수정 연출이 완성 공연에선 어떻게 극복했을지가 관심사다.
최근 연극계 경향을 반영하듯 소설을 연극화한 무대도 다수 눈에 띈다. 프랑스 공쿠르상 수상 작가 로맹 가리의 ‘자기 앞의 생’ 이창동 영화감독의 소설 ‘녹천에는 똥이 많다’ 독창적이고 신랄한 문체로 현대 프랑스 문학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아멜리 노통브의 ‘추남, 미녀’ 등이 연극의 언어와 문법으로 재탄생한다.
이밖에 놓치지 말아야 할 재연작들도 있다. 시종일관 웃음폭탄을 장전한 연극 ‘대학살의 신’부터 제54회 동아연극상에서 연출상, 무대예술상, 연기상을 휩쓴 ‘나는 살인자입니다’, ‘햄릿’을 비틀어 재벌가 딸의 이야기로 보여주는 ‘함익’ 2014년과 2017년 전석 매진을 기록한 화제의 연극 ‘맨 끝줄 소년’ 등, 지난해 창작산실 창작극 최고의 화제작 ‘‘미인도’ 위작 논란 이후 국립현대미술관 제2학예실에서 벌어진 일들’이 돌아온다.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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