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나는 망생이다. 드라마작가 지망생. 그것도 장장 15년 묵은 망생이.
수많은 공모전에 도전해 단 한 번 작은 상을 탔을 뿐 수많은 낙방을 맛봤다. 약간 돌아서 가는 길이라 생각해 영화판도 기웃거렸지만 내 이름을 걸고 개봉된 영화는 상영관 단 한 곳에 걸렸던 그 누구도 모르는 독립영화 한 편이 전부다. 소위 ‘영업’이라는 것을 뛰어서 드라마 관계자들에게 내 기획안과 대본을 읽히는 기회도 얻어봤지만 그 기회는 데뷔로 이어지지 않았다. 하다 보면 기회가 있겠지 싶어 빨대 꼽히는 아이디어뱅크를 자처하고 시작한 기획작가 생활도 이 회사, 저 회사 메뚜기를 뛰며 많은 해를 넘기고 있었다.
지난해 이맘때쯤 거금 5만원을 주고 사주를 봤다. 기획작가 일도 그만뒀던 때였고 정말 해볼 만큼 다 해봤다는 생각이 들어 벼랑 끝에 내몰린 심정이었다. 포기할 작정으로 사주를 본 것은 아니다.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분명 드라마작가가 되기는 될텐데, 그러니까 그게 도대체 언제쯤인지 알고 싶어서 본 사주. 결과는 딱 새해부터 풀리기 시작한단다. 돈 5만원 버렸네. 툭 털고 다시 시작하자 마음먹었다. 그렇게 새해 아침에 일어나서 늘 그랬듯 노트북 앞에 떡진 머리 벅벅 긁어가며 좀비처럼 앉아 키보드를 두드렸다.
“오펜 공모전에 당선되셨습니다.” 무려 12년 전에 써서 그대로 냈던 작품의 당선연락을 받고 심히 의심했다. TV에 종종 나오는, 꿈을 좇다 자기 망상을 사실로 믿는 정신병에 걸린 이들처럼 내가 결국 그 지경까지 갔나 싶었다. 휴대폰에 녹음된 통화내용을 듣고 또 듣고서야 안심했다. CJ ENM의 사회공헌사업이라더니 내가 휠체어 타는 장애인인 것을 알고 뽑았나 의심도 했지만 나의 장애 사실에 동공의 지진이 훤히 보일 만큼 짐짓 당황하는 관계자분의 목소리에 그것도 아님을 알게 됐다. 내게 꿈을 향해 ‘좀 더 세게 달려도 돼!’ 하고 북돋우는 응원이었더랬다.
왜 그렇게 드라마작가가 되고 싶냐면 다수의 사람들과 안방 TV를 통해 나의 감정과 가치관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게 너무나 매혹적이다. 비록 내 몸은 한 평 남짓 휠체어에 갇혔지만 나의 상상은 누구보다 높고 멀리 난다. 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10년·20년이 더 걸릴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늘 그런 것처럼 밝아오는 새해에 눈을 뜨고 일어나면 노트북 앞에 앉아 기획안과 대본을 쓰는 좀비가 될 것이다. 기꺼이 그럴 테다. 그렇다. 노트북 앞 좀비, 나는 작가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