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 한반도 주변 4강이 지정학적 근육을 키우고 있다. 힘의 논리를 앞세운 열강들의 요구와 압박에 우리가 선제적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국익을 훼손당할 엄중한 상황에 처해 있다. 20세기 초 냉전 시대에는 진영논리로 동맹을 보호하는 방패막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서로가 서로에게 칼을 들이미는 적자생존의 외교·안보 생태계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변화된 국제정세에 맞춰 그네뛰기 외교는 절대 금물이고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곧추세워 스스로 보호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한 셈이다. 동맹국 미국이 한국을 겨냥해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방위비 증액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는 전 세계 많은 매우 부유한 국가의 군대에 실질적으로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지만 이들 국가는 무역에서 미국과 미국의 납세자를 완전히 이용하고 있다”면서 “나는 이것을 문제로 보고 고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대선후보 시절인 지난 2016년부터 한국의 안보 ‘무임승차론’을 언급해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번 발언은 한국을 정면으로 겨냥한 것이다.
두 눈을 부릅뜬 트럼프의 압박에 올해부터 적용될 제10차 한미 방위비분담금특별협정(SMA) 체결을 위한 협상은 아직 결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방위비 분담금을 현재의 두 배 규모로 늘려야 한다는 입장이며 미 정부도 현재보다 50% 인상된 연간 12억달러(약 1조3,000억원) 수준을 요구하고 있다. 더 나아가 트럼프 대통령은 주한미군 감축 가능성도 시사하고 있다. 북한의 무력도발을 억제하고 동아시아 안정을 담보했던 주한미군 감축 카드를 꺼내 든 것은 동맹이 아니라 ‘돈’의 논리로 대한 외교정책을 끌고 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외교 입지는 좁아지고 비즈니스 영역이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외교 전문가는 “안보는 미국에 의존했던 기존 패러다임에 경종이 울리고 있다”며 “북한의 오판을 막을 수 있도록 자체 군사력을 더 보강하고 미중 등 열강이 한국을 패싱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고슴도치 날을 세워야 한다”고 지적했다.
경제·군사력의 덩치를 키운 중국은 더 심하게 한국을 위협하고 있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 사태로 중국은 이미 한국 대기업과 관광 업계에 치명적인 손실을 안겼다. 예리한 사드의 칼날을 들이대며 우리 안보정책에 변화를 주려 했다. 사드 문제가 처리됐기 때문에 시진핑 주석이 문재인 대통령의 방중을 허락했다는 외교적 오만함도 그대로 드러냈다. 그동안 안보는 미국에 의존하고 경제는 중국에 기댄다는 ‘안미경중’ 프레임이 적용됐는데 이 같은 인식도 궤도수정이 불가피하게 된 것이다.
서경펠로(자문단)인 진창수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중국이 한국에 대해 갖고 있는 대국의식은 언제든지 표출될 수 있다”며 “한국은 지금까지의 수동적인 외교에서 벗어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한중 관계를 모색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북한 비핵화에도 고슴도치 전략이 필요하다. 1970년대 이스라엘 총리를 지냈던 여장부 골다 메이어는 국민들에게 “우리는 아랍과의 전쟁에서 최종 병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지면 끝장’이라는 절박함”이라고 외쳤다. 미국에 대해서는 사거리를 확대하는 등 우리의 미사일 주권을 앞세워 방어력을 높여야 한다. 중국에 대해서는 북한 비핵화에 비협조적일 경우 우리도 원자력협정을 개정하는 등 상호확증파괴 능력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줘야 한다.
일본의 압박도 거세다. 일본은 해군과 공군력을 강화하며 한국을 향해 수시로 무력도발을 일삼고 있다. 지난해 12월 광개토대왕함에 대한 일본의 억지 주장이 대표적이다. 한국과는 대립각을 세우면서 중국과 러시아에는 화해의 손짓을 하고 있는데 동북아에서 ‘코리아 패싱’을 하겠다는 의도가 다분하다. 신인균 자주국방네트워크 대표는 “현실적으로 우리가 중심이 되기는 어렵지만 과거 약소국·개발도상국일 때와는 위상이 완전히 다르다”며 “지정학적 위치가 중간이라고 해서 이도 저도 아닌 중간자적 입장을 취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했다. 진 위원은 “전통적인 우방인 한미일 관계를 굳건히 하면서도 외교 다변화를 추구해야 한다”며 “동북아 평화 번영에서 한국의 역할을 찾는다든가 하는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정영현·박우인기자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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