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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철인왕은 없다] 민주주의여, 이젠 '테이블'로 가라

■이한 지음, 미지북스 펴냄

대의제 '다수결의 원리' 경계

시민 참여·치열한 토론 전제

해결책 모색 과정 중시하는

'심의 민주주의' 대안으로 제시





지난 1989~1999년 아르헨티나 대통령을 지낸 카를로스 메넴은 대선을 치를 당시 케인스주의에 입각한 복지 중심의 공약을 내걸었다. 그랬던 그는 대통령이 되고 난 뒤 한두 달도 지나지 않아 엄격한 긴축재정, 공공 부분의 사유화, 사회보장비 감축을 핵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행했다.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페루의 알베르토 후지모리도 메넴과 유사하게 급격한 ‘정책 전환’을 시도한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 지도자들이다. 이들이 집권 후 공약과는 180도 다른 정책을 추진한 것은 소신의 변화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치밀하게 계획한 모종의 전략이었을까.

이한 변호사가 쓴 ‘철인왕은 없다’는 곳곳에서 분출하는 다양한 사회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법률가이자 시민교육센터 대표인 저자는 민주주의와 정치철학에 관심을 두고 꾸준한 집필 활동을 해오고 있다.

책은 우선 대다수 현대 사회가 채택한 대의제 민주주의의 철학적 근간인 ‘엘리트주의’와 ‘대중 민주주의’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엘리트주의는 능력을 지닌 소수의 사람이 중요한 의사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 이념이다. 일찍이 플라톤이 ‘국가’에서 제안한 ‘철인왕(哲人王)’의 개념이 엘리트주의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대중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이들은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능력의 차이가 통치에서 대중을 배제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소수의 엘리트가 권한을 독점하면 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가 온전히 관철되기 힘들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철인왕은 없다’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이러한 엘리트주의와 대중 민주주의의 ‘어중간한 타협’이라고 규정하면서 이 제도가 갖는 근본적인 한계를 파헤친다. 저자가 보기에 라틴 아메리카의 지도자들에게서 유독 자주 발견되는 ‘정책 전환’ 현상은 대의제의 딜레마와 결함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례다. 메넴과 모랄레스는 왜 효율 중심의 개혁 정책을 선거 때부터 선전하지 않았을까. 세금을 퍼주겠다는 달콤한 공약으로 유권자를 현혹하지 않으면 선거에서 패배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작동한 탓이다. 이런 방식으로 선거가 ‘의사소통의 장’이 아닌 ‘정략적인 거짓말의 장’으로 전락하면 민주주의의 이념을 올바로 실현하기는 불가능하다고 저자는 꼬집는다.



물론 대의 민주주의가 일정한 한계를 노출한다고 해서 고대 아테네에서 시행된 직접 민주주의를 만병통치약처럼 생각하는 것은 곤란하다. 갈수록 복잡해지고 다원화하는 사회, 정보의 불평등, 명확한 책임을 부과할 대상의 부재 등 순수한 직접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힘든 이유는 차고 넘친다. 독자들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한 비관론에 사로잡히려는 찰나, 저자는 ‘심의 민주주의’라는 해법을 제시한다.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시민의 참여와 치열한 토론을 전제하는 심의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리를 맹신하며 일사천리로 의사결정을 진행하는 방식을 경계한다. 미국의 일부 주 정부나 주 의회에서 시행하는 ‘국민투표(referendum)’ 제도는 심의 민주주의를 구현한 훌륭한 사례다. 국민투표는 일정 수의 국민이 서명하면 공식적으로 법안 발의가 이뤄지고 이 법안에 대한 선거구민 투표 결과를 바탕으로 정책을 도입하는 제도다. 경찰과 시민이 함께 참여하는 ‘공동체 치안 구역 회의’를 통해 치안 상황을 크게 개선한 미국 시카고의 사례도 주목할 만하다. 저자는 “심의 민주주의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시민이 충분한 정보를 검토한 뒤 더 나은 해결책을 찾기 위해 숙고하는 과정을 중시한다”며 “심의 과정을 통해 도출한 결과를 공동체의 정치적 결정에 반영할 때 우리의 민주주의는 대의제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고 강조한다. 1만3,800원 /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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