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22)는 지난달 17일 상습 상해 등과 관련한 조재범(38) 전 코치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며 “앞으로 스포츠계 어디에서도 절대로 일어나선 안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 엄벌해주시면 좋겠다”고 했다. 조 전 코치에게 상습적으로 성폭행까지 당했다며 추가로 고소장을 제출한 것도 이날이었다는 사실은 지난 8일 경기남부지방경찰청을 통해 알려졌다. 고소장에 따르면 심석희는 고교 2학년 때부터 4년 가까이 선수촌과 훈련장 등에서까지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 보도 이후 인터넷 댓글에는 어렵게 용기 내줘서 고맙다는 내용이 줄을 이었다.
올림픽 금메달만 2개인 쇼트트랙 최고 스타가 관계된 이번 사태가 성폭력 등 체육계의 해묵은 비위를 근절하는 촉매제가 될 수 있을까. 이제 관건은 관계기관의 확실한 대책 마련과 체육계의 자정 노력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9일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브리핑을 열고 체육계 성폭력 비위 근절을 위한 대책을 발표했다. 노태강 문체부 2차관은 “이번 사태는 그동안 정부와 체육계가 마련해왔던 모든 대책이 사실상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모든 대책과 제도를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각국 국가올림픽위원회(NOC), 국제경기연맹(IF)과의 협조다. 노 차관은 “성폭력 혐의가 확증되는 인원에 대해 영구제명은 물론이고 이를 IOC와 각국 NOC 등에 통보할 것이다. (체육계 성폭력은) 전 세계적인 관심사이기 때문에 국내에서 영구제명의 징계를 받은 인원이 다른 나라의 체육 관련 단체에서 일하는 것은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금까지는 국내에서 성폭력 등으로 물의를 빚었던 지도자가 해외에서 활동을 이어갈 경우 이를 막을 방법이 사실상 없었다. 실제로 비위를 저지르고도 국내에서 쌓은 노하우를 발판 삼아 외국에서 버젓이 활동하는 사례도 종종 있었다. 문체부는 징계 내용을 대한체육회 각 경기 단체 홈페이지 등에 상시 게재하고 문제가 큰 단체의 경우 대한체육회 가맹단체에서 제외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영구제명의 기준은 현재까지는 체육회 스포츠 공정위원회 규정상 ‘강간과 유사 강간, 이에 준하는 성폭력’이었다. 앞으로는 ‘중대한 성추행’의 경우에도 영구제명하는 것으로 규정을 강화한다.
노 차관은 “워낙 폐쇄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 체육계는 선후배 간이나 지도자와 선수 간 위계 질서가 워낙 강력해 피해 선수가 자기 인생을 걸지 않는 한 용기를 내기 힘든 구조다. 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스포츠계 문화 자체를 장기적으로 바꿔나가겠다”며 “어릴 때부터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교육부, 여성가족부와도 협의해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문체부는 시민 단체와 여성 단체가 참여하는 태스크포스를 구성하고 민간 주도의 체육 단체 대상 특별 조사를 실시한다. 조사 과정에서 문제가 발견될 경우 사태를 축소 해석할 우려를 경계해 문체부와 체육계는 조사를 지원하는 역할에 머물고 철저하게 외부 주도의 조사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양준호기자 miguel@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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