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71) 전 대법원장이 11일 오전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을 받는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출석한다. 전·현직을 막론하고 사법부 수장을 지낸 법관이 피의자로 검찰 조사를 받기는 헌정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검찰이 지난해 6월18일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에 사건을 재배당해 수사에 나선 지 207일 만에 의혹의 정점에 있는 양 전 대법원장을 소환하면서 사법농단 수사가 최대 고비를 맞는다.
서울중앙지검 수사팀(팀장 한동훈 3차장검사)은 이날 오전 9시30분 양 전 대법원장을 소환해 지금까지 제기된 각종 의혹들에 대한 사실관계를 조사한다. 그는 2011년 9월부터 6년 동안 대법원장으로 재직하며 임종헌(60·구속기소) 전 법원행정처 차장과 박병대(62)·고영한(64)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 등에게 ‘재판거래’ 등의 구상이 담긴 문건을 보고받거나 직접 지시를 내린 혐의를 받고 있다. 양 전 대법원장에게 걸려 있는 범죄 혐의는 40개가 넘는다. 양 전 대법원장은 ▲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민사소송 ‘재판거래’ ▲ 옛 통합진보당 의원 지위확인 소송 개입 ▲ 헌법재판소 내부정보 유출 ▲ 사법부 블랙리스트 ▲ 공보관실 운영비 비자금 조성 등 각종 의혹에 대부분 연루되어 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지난해 6월 1일 재판 거래 의혹에 대해 경기 성남시 자택 인근 놀이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재판을 흥정거리로 삼아서 재판 방향을 왜곡하고 거래하는 일은 생각할 수도 없다”며 전면 부인한 바 있다. 사법농단 사태를 촉발한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에 대해서도 “정책에 반대를 한 사람이나 또는 일반적 재판에서 특정 성향을 나타냈던 사람이나, 법관에게 어떤 편향된 조치를 하거나 아니면 불이익을 준 적이 전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이날 조사에서도 혐의를 순순히 인정하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따라서 양 전 대법원장이 임 전 차장을 비롯한 실무진과 얼마나 구체적인 지시·보고를 주고받았는지를 객관적으로 입증하는 게 검찰 수사의 최대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검찰 관계자는 “(사실관계를) 추궁할 상황은 아니다. 본인의 입장을 듣는 방식으로 진행할 것”이라고 밝혀 혐의 입증에 자신감을 보였다.
검찰은 지난달 초 박 전 대법관과 고 전 행정처장의 구속영장이 기각된 이후 양 전 대법원장이 각종 의혹에 직접 개입한 흔적을 찾는 데 주력해왔다. 그 결과 양 전 대법원장이 일본 전범기업을 대리하는 김앤장 법률사무소 대리인과 수차례 만나 징용소송 재판의 방향을 의논하고, 특정 성향의 판사들에게 인사상 불이익을 주기 위한 ‘블랙리스트’ 문건에 직접 서명하는 등 적극 관여한 정황을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양 전 대법원장은 본격 조사에 들어가기 앞서 이번 수사를 지휘하고 있는 한동훈 3차장검사와 티타임을 가지며 조사 방식과 순서 등에 대한 설명을 들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서울중앙지검 15층에 있는 특별조사실에서 특수부 부부장검사들에게 피의자 신문을 받는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이 연루된 의혹이 방대한 만큼 추가 소환조사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지난해 6월 회견을 가진 이후 7개월 동안 잠적했던 양 전 대법원장은 검찰 출석에 앞서 오전 9시 대법원에서 사법농단 사태에 대한 입장과 검찰에 출석하는 심경을 밝힌다. 양 전 대법원장이 기자회견을 예고한 곳에 이미 여러 건의 집회·시위가 신고된 데다 법원노조가 “법원 내 적폐세력을 결집하겠다는 의도”라며 회견을 저지하겠다고 밝혀 충돌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박원희 인턴기자 whatamov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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