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모이’는 사투리, 말의 재미가 살아있는 영화이다. 적재적소에 어울리는 대사의 말맛을 살려내는 배우 유해진이 중심을 지켜줬기에 가능했다.
유해진은 최근 서울 삼청동의 ‘보드레 안다미로’ 카페에서 진행된 영화 ‘말모이(엄유나 감독)’ 인터뷰에서 “이번에도 별다른 건 없었어요. 그저 전체 스토리에 거북스럽지 않게 녹아 들어야겠단 생각뿐이었죠”라고 담담히 말했다.
9일 개봉한 영화 ‘말모이’는 주시경 선생이 남긴 최초의 ‘조선말 큰 사전’의 모태가 된 ‘말모이’의 탄생 비화를 영화화했다. 우리말 사용이 금지된 1940년대, 까막눈 판수(유해진)가 조선어학회 대표 정환(윤계상)을 만나 사전을 만들기 위해 비밀리에 전국의 우리말과 마음까지 모으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
‘말모이’는 평범한 사람들의 작지만 큰 선택을 그린다. 사십 평생 처음으로 ‘가나다라’를 배우면서 정환과 동지가 되고, 마침내 ‘말모이’ 작업에 누구보다 열심히 참여하게 되는 ‘김판수’의 변화와 성장의 과정이 영화 속에 담겼다.
유해진은 “우리말을 찾고 기록하려는 분들이 계셨구나를 이 영화를 통해 더 깊게 알게 된 것 같다. 우리말을 참 소중하게 지켜왔구나를 느끼는 작업이었다”며 영화를 참여하면서 느끼게 된 남다른 소감을 밝혔다.
‘택시운전사’의 각본을 통해, 1980년 5월 광주로 우연히 들어가게 된 한 평범한 사람의 시선과 변화를 통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졌던 엄유나 감독의 사람 이야기는 ‘말모이’에서도 강력하다. 엄유나 감독과 다시 만난 유해진은 “‘말모이가 꼭 이야기 할 필요가 있는 영화라고 생각해 참여하게 됐다”고 전했다.
“인연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만으로 작품을 선택할 수는 없어요. 역할에 맡는 다른 주인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전작인‘택시 운전사’가 워낙 좋았으니, 작품에 대한 기본적인 궁금증이 있었죠. 무엇보다 ‘판수’가 한글을 모르는 까막눈에서 점차 변화해나가는 과정을 잘 표현해내면 재미있을 것 같았고 꼭 해야 될 이야기란 점에 끌렸어요.”
영화 속에선 ‘말모이’가 뭔지도 왜 우리말을 지켜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나 이제 김순희 아니고 가네야마래요. 나는 김순희 좋은데”라고 말하는 어린 ‘순희’를 통해 가슴 아픈 일제강점기의 시대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판수’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딸 ‘순희’다. 이 지점에서 그는 관객들의 공감과 설득을 높일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고 했다.
“판수가 학회 활동에 다시 참여하는 것은 ‘순희’가 좋아하는 한글 이름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자, 보잘것없는 못난 아비로서 아이한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했어요. 과정이 너무 급작스럽다면 모르겠는데, 되게 급작스런 변화는 아니었어요. 판수의 행동은 자기 자식의 학비를 벌기 위한 선택이었고, 거기서 한 스텝 나아가는 과정이 있었어요. 마지막의 선택도 충분히 일련의 변화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이런 분들이 꽤 많으셨던 것 같아요. 그게 판수처럼 도드라지게 적극적으로 하셨던 분도 계셨겠지만, 드러나지 않으셨던 분들도 꽤 많으셨던 것 같아요. ‘택시운전사’도 마찬가지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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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진과 윤계상은 우리말에 눈 뜬 까막눈 판수와 조선어학회 대표 정환으로 조우했다. 영화 ‘소수의견’ 이후로 두 번째 호흡을 맞춘 유해진과 윤계상, 유해진은 “드립커피가 한 방울 한 방울 모여서 진한 커피가 되듯, 계상 씨와도 그런 것 같다. 3년 만에 만나 하니까 ‘동지’란 말이 더 와닿는 것 같다. 동지 개념이 생기는 것 같다”고 말하며 끈끈한 우정을 내보인 바 있다. 그는 “본업이 가수였던 사람이 배우로서 자리 잡기까지의 과정이 분명 어려웠을 거고 그만큼 대단하다 느낀다. ”며 진심으로 윤계상의 성장을 응원했다. ‘
“‘소수의견’때보다 감정이 깊어졌어요. 계상이가 맡은 ‘정환’은 감정을 숨겨야 하는 인물이거든요. 본인도 큰 도전이었다고 이야기하지만 절대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고 봐요. 개인적으로는 좀 더 가까워진 것 같아요. 특히 계상이가 술이 많이 늘었던걸요. ‘소수의견’ 때는 모처럼 기분 내려고 하면 한잔먹고 바로 얼굴이 빨개졌었는데.. 같이 세월을 먹는 듯한 느낌이랄까.”
‘말모이’에서 유해진의 디테일을 느낄 수 있는 장면으론, 연필에 침을 묻힌 뒤 꼭꼭 눌러서 삐뚤 삐뚤한 글씨로 편지를 쓰는 장면과 ‘판수’가 ‘정환’에게 더 이상 학회 활동을 못 하겠다고 말하는 장면을 꼽을 수 있다.
“후반부에 아이들에게 보내는 편지 장면은 ‘무사’의 김성수 감독님의 모습을 참고했어요. 감독님이 연필을 되게 독특하게 쥔다. 한글 쓰는 데 서툰 효과를 내기 위해 그분을 흉내 냈어요. 아무래도 감정적으로 중요한 편집이기 때문에, 소품팀이나 미술팀에 맡기면 마음이 덜 가거든요. 제가 직접 쓰면 마음이 좋죠. 정작 힘들었던 것은 후시 녹음이었어요. 편지 속 어투가 ‘판수’는 잘 쓰지 않는 문어체였거든요. 판수가 쓰지 않는 문어체가 나오잖아요. ‘나는 그렇게 생각했단다. 미안했단다. ’ 이걸 어떻게 읽어야 하나. 판수 스럽게 찍으면 산통이 다 깨지는거잖아요. 짧은 분량인데 결국 첫째 날에는 못 끝내고 며칠 뒤에 다시 가서 그 부분만 녹음했어요.”
유해진은 배우로서 느끼는 즐거운 순간은 “상황에 맞는 말을 찾았을 때”라고 했다. 전체 스토리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는 적확한 단어와 문장을 찾아내는 게 쉽지 않지만, 고민 끝에 찾아놨을 땐 행복감을 느낀단다. 이번 영화에선 “미안해요. 힘들 때 이래서”란 대사이다. 판수의 심경을 가장 정확하게 전할 수 있는 단어는 그렇게 탄생했다.
“상황에 맞는 말을 찾았을 때 기분이 참 좋아요. ‘말모이’에서 ‘판수’가 ‘정환’에게 더 이상 학회 활동을 못 하겠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잖아요. 그때 ‘판수’가 마지막에 하는 말을 무엇으로 할까를 두고 많이 고민했어요. “미안해요. 힘들 때 이래서”다. 동지였던 누군가에게 어려운 이야기를 할 때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계속 남아 있었거든요. 계속된 생각 끝에 운 좋게 찾아낸 대사죠.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일 수 있는데, 인물의 마음을 누구보다 제가 잘 전달해야 하는 거잖아요. 영화의 색깔에 맞는 적절한 말을 발견해내는 기쁨이죠.“
인간미와 함께 공감의 통찰력을 지닌 배우 유해진은 새로운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이나 욕심은 없다고 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재미있고 의미 있는 작품에 충실하게 녹아드는 것” 뿐이었다.
“제가 무슨 카멜레온도 아니고 매번 새로운 걸 어떻게 보여드리겠어요. 하하하. 사실 이미 보여줄 건 다 보여준 건 같아요. 다들 제가 어떻게 연기하실지 알고 계시잖아요. 뭔가 새로운 모습을 보여 드리는 것보단, 전체의 스토리가 더 재미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연기를 보여주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저 작품에 충실하게 녹아드는 일 뿐이죠.”
/정다훈기자 sestar@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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