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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 명동예술극장





구한말 초기만 하더라도 서울 명동 일대는 청나라 상권의 중심이었다. 임오군란 등을 겪으며 청나라의 영향력이 커지자 명동에는 청국 상인들이 자리를 잡았다. 사정이 달라진 것은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하면서부터다. 이후 청나라 상인들은 속속 명동을 떠났고 그 빈자리를 일본인들이 채웠다. 조선인들이 이곳을 자주 찾게 된 것은 영화와 관련이 있다. 1927년 미국에서 상용화된 ‘토키(Talkie) 영화’가 3년 뒤 조선에 상륙하자 영화 관람객이 급증했다. 영상에 음성 대사가 같이 나오는 유성영화는 당시만 해도 획기적인 것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1936년 10월7일 일본인 사업가 이시바시 료스케가 명동 한복판에 세운 극장이 ‘명치좌(明治座)’다. 1,178석의 3층짜리 이 영화관은 당시 조선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 영화전용 극장이어서 무대공연은 많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서 조선악극단이 처음 공연한 것은 1941년 5월이다. 조선악극단의 자매단체인 ‘오케싱잉팀’이 영화상영 중간중간에 대중가요 공연을 했다. 오케레코드 소속 가수들인 남인수와 이난영·고복수 등이 나와 ‘애수의 소야곡’과 ‘목포의 눈물’ 등을 불렀다.

광복 이후 국제극장으로 운영되던 이 건물은 공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문화예술계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서울시에 인수된 뒤 시민회관으로 사용된다. 1957년 6월1일에는 명동예술회관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이후 1973년 10월17일 남산국립극장이 개관할 때까지 16년간 국립극장 역할을 하게 된다. 1975년에는 대한투자금융에 매각돼 금융업체 건물로 변신하기도 했다. 한때 헐릴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문화관광부가 건물을 사들여 2009년 6월 명동예술극장으로 거듭났다.



최근 연극 전문 공연장인 명동예술극장을 K팝 콘서트장으로 사용하자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외국인 관광객 활성화를 위한 간담회 자리에서 일부 상인들이 용도변경을 건의했고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검토 의사를 밝히자 갑론을박이 벌어진 것이다. 상인들의 요구대로 용도가 변경되면 장사에는 다소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국립극단이 운영하고 있는 사실상 하나밖에 없는 순수연극 무대가 사라지면 극예술의 위축은 불가피해 보인다. 모쪼록 문화계의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향으로 결말이 났으면 좋겠다. /오철수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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