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상선의 시대가 다시 열릴까. 러시아에 이어 미국도 일반 상선에 컨테이너 수납식 미사일 시스템 탑재를 구상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비용의 획기적 절감과 다양한 위협에 대응한다는 차원에서다. 미 해군의 이런 움직임은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낳고 있다. 보다 낮은 비용으로 억지력을 확보할 수 있는 반면 새로운 군비 경쟁과 긴장을 유발하고 군과 민간의 영역과 구분을 흐리게 만들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더욱이 이 같은 시스템은 개발 비용이 크지 않고 가격도 상대적으로 낮아 개발도상국이나 테러집단에 흘러갈 경우 부작용까지 우려된다.
◇미국도 컨테이너식 발사대에 관심=외신에 따르면 미 해군은 컨테이너식 미사일 시스템에 대한 연구를 지속 중으로, 최근 들어 경향이 바뀌는 조짐이다. 처음에는 러시아가 개발한 ‘클럽-K(Club-K)’ 미사일 대응방안을 연구했으나 이제는 직접 개발해 사용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고 있다. 유력 군사 웹진인 ‘뉴빅퓨처’는 미 해군이 민간 상선 15~20척을 군함으로 변경하는 프로젝트를 연구하고 있다는 정보를 전했다. 상선 한 척당 대함·대공미사일 20~40발이 탑재될 수 있도록 개조한 뒤 군함으로 용도변경을 한다는 것이다.
◇조함 가격 인하 압박책일 가능성도=이런 논의의 배경은 돈에 있다. 컨테이너 발사대로 무장한 상선함대가 적재 가능한 미사일은 어림잡아 300~450발. 미 해군 구축함이 보유한 90발보다 훨씬 많다. 신형 구축함 건조 비용의 2~5% 정도면 개조가 가능해 가격 대비 성능 비율이 좋다고 할 수 있다. 미 해군이 얼마나 진지하게 이 사안을 추진할지는 가늠하기 어렵지만 주목할 게 몇 가지 있다. 먼저 최근 들어 ‘미국 내 군함 건조 비용이 너무 비싸다’는 불만이 부쩍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국내 조선소 건조를 비롯해 몇 가지 조건이 붙은 존스법 제정(1920년) 이래 미국 조선 업계가 내수를 배타적으로 독식하는 동안 노임이 뛰고 산업 자체의 경쟁력을 잃었다. 미군 내에서는 ‘주요 함정의 획득단가가 유럽보다 20~50% 비싸며 중국의 건함 비용은 미국의 20~40% 수준’이라는 지적도 잇따른다. 미 해군이 자국 내 조선소들에 가격 인하를 유도하기 위해 새로운 신형 선박 발주 대신 ‘민간 중고 선박의 개조론’을 흘렸다는 해석도 있다. 미 해군이 당장 상선에 컨테이너식 발사대를 적재하지는 않더라도 중형 함선 이하에 관리 비용이 낮고 탈부착도 용이한 컨테이너식 발사대를 개발할 가능성은 상존한다. 또 컨테이너식 발사대의 선구 격인 러시아의 발사 시스템과 플랫폼 다양화 노력도 여전하다.
◇컨테이너 미사일의 선구 러시아 클럽-K 시스템=러시아는 이미 10여년 전부터 연구를 시작해 다양한 형태의 컨테이너 미사일 시스템을 선보였다. 러시아의 설명에 따르면 일반 컨테이너 3개면 2개 발사대와 통신 및 지휘시설의 설치가 가능하다. 몇 해 전 유튜브에서는 관련 동영상이 나돌며 관심을 끈 적도 있다. 컨테이너식의 특징은 위장 효과와 운용의 다양성. 겉으로 보기에는 일반 컨테이너와 똑같다. 화물 자동차에 실려 고속도로를 달릴 수도, 열차에 적재될 수도 있다. 100톤급의 작은 선박에서 수십만톤급의 대형 선박까지 탑재 및 운용이 가능하다. 만약 최대 규모인 2만3,000TEU급 컨테이너선에 위장된 컨테이너 클럽-K 몇 대를 숨기면 찾아내기 어렵다.
◇20세기 물류혁명 이끈 컨테이너가 21세기 분쟁 씨앗 될라=컨테이너와 기중기, 철도나 트럭이 결합된 컨테이너 화물 체계가 처음 등장한 시기는 1956년 4월. 이후 60년 동안 세계무역의 물동량은 무려 1,600만배나 늘어났다. 미국 경제학자 마크 레빈슨의 ‘더 박스, 컨테이너의 역사를 통해 본 세계경제학(2006)’에 따르면 컨테이너는 20세기 중반 이후 세계 경제발전을 이끈 주역이다. 최근 들어 원유나 석탄가루를 싣는 사각 드럼통(컨테이너)이 생기고 조립주택의 주요 자재로도 쓰인다. 그러나 상호 의존적이던 용도가 상호 파괴적으로 바뀌어가는 분위기다. 미국뿐 아니라 이스라엘과 중국 등도 일찌감치 컨테이너식 미사일 개발에 나섰다.
◇‘무장상선’ 재등장할 만큼 각박해진 현실=유럽이 바다를 통해 세계사를 주도한 15세기 중반에서 17세기 중후반까지도 군함과 일반 상선의 경계는 거의 없었다. 원거리 항해에 나서는 배는 건조 방식과 크기가 같았고 용도에 관계없이 으레 무기(대포)를 실었다. 교역선 겸 전투함인 원양 선박이 군함과 상선으로 확연하게 갈라지기 시작한 시기는 17세기 이후다. 군함의 크기와 탑재 대포 수에 따라 등급이 정해졌다. 해군과 ‘뱃사람’의 구분도 불명확한 시절, 몇몇 나라는 ‘위장해군’까지 운용했다. 말이 해군이지 해적과 다름없는 민간인들이었던 이들은 국가로부터 정식으로 나포 권한을 받았다.
국가로부터 타국의 선박을 나포해도 좋다는 면허를 받은 사략선(私掠船·privateer)을 운영한 대표적인 국가가 바로 영국이다. 스페인과 포르투갈보다 뒤처지자 반은 위장해군, 반은 해적인 사략선단을 운용하며 바다와 영토 확장 경쟁에 끼어들었다. 사략선장으로 가장 유명한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영국에 상륙하려는 스페인의 무적함대(아르마다)와 일전을 앞두고 영국 해군의 부사령관으로 정식 임명되며 해군 노릇도 해냈다. 영국을 거쳐 프랑스 등으로 퍼졌던 ‘상선을 가장한 전투함’은 증기선 발명과 근대화 이후 각국의 군율이 엄격해지고 현대적 외교관계가 자리 잡으며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물론 예외는 없지 않다. 1·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과 영국이 대형상선을 소형항공모함으로 개장하고 쾌속선을 전투함으로 전용한 사례가 있다. 아르헨티나와 영국이 포클랜드 영유권을 둘러싸고 싸웠던 1982년 포클랜드 전쟁에서는 당시 초호화 여객선 7만톤급 ‘퀸엘리자베스2세’호가 병력수송함으로 징발돼 여단 규모의 병력을 실어날랐다.
◇컨테이너식 발사대 운용 제한 국제적 규제 필요=그러나 평시에 민간 상선이 군용으로 전용되거나 개조된 사례는 찾기 어렵다. 러시아가 관련 무기를 개발하는 것도 모자라 최강대국 미국에 중국·이스라엘이 따라붙는 형국이라면 확산은 두말할 것도 없다. 컨테이너식 미사일 시스템이 퍼지면 누가 손해 보고 누가 이로울까. 확산 시 세계 경제 타격은 불문가지다. 교역 위축이 불가피하다. 컨테이너식 미사일에 대한 경계가 심해지면 검수가 까다로워지고 교역에 걸리는 시간도 늘어나기 마련이다. 1만개에서 2만개 넘는 컨테이너를 적재한 선박을 일일이 검사하기는 불가능하다. 제작할 수 있는 나라도 많다. 기술 수준이 높지 않고 가격도 비싸지 않아 개도국들도 직접 개발 또는 수입이 가능하다. 테러집단으로 유출되면 평화와 발전의 상징이던 컨테이너는 그야말로 불특정다수를 대량살상할 수 있는 흉기로 변한다.
화물차와 열차, 중소·대형 선박에 위장 탑재가 가능한 컨테이너식 미사일에 국제 공동의 규제를 가할 필요가 있다. 전시에 군복을 입지 않은 군인은 스파이로 간주돼 포로로 대우받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컨테이너식 관련 무기를 개발해도 군사용이라는 표식이 확실하며 국내 방어용에 국한돼야 한다는 대전제가 필요하다. 군함에 적재되지 않는 컨테이너 미사일 시스템의 해외 배치를 침략에 준하는 행위로 간주하는 공감대도 필요해 보인다. 20세기의 물류혁명과 경제번영을 이끈 컨테이너가 우리 시대인 21세기 초입에 분쟁과 갈등의 도구로 변할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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