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20일) 방송되는 KBS1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105인의 암살자, 조선 총독을 노리다!’ 편이 전파를 탄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된 후,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조선에 등장한다. 일본 내각의 육군성 출신이자, 조선의 식민지를 강력하게 주장하던 강경파다. 1910년 강제병합 이후 초대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 데라우치는 식민지 조선에서 절대 권력을 행사하며 강압 통치를 자행한다. 잔학한 식민 통치의 서막이었다.
▲ 데라우치 총독 암살 시도?
1910년 12월, 데라우치 총독이 압록강 철교 개통식에 참석하기 위해 평안도 일대를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독립 운동가들은 동지들을 규합한다. 무려 150여 명 인원이 70정의 단총을 들고 선천역에 모이는데.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과 확연히 비교되는 대규모 암살단! 일제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과연 그들은 데라우치를 쏘는데 성공했을까?
▲ 총독 암살 사건의 배후는 비밀결사 신민회?
관련기사
데라우치 암살 사건 이후 일제의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벌어진다. 이때 구속된 독립운동가들은 김구, 윤치호 등 무려 700여 명! 사건이 벌어지기 한 달 전, 일본은 무관학교 설립을 위해 군자금을 모금하던 독립운동 세력을 잡아들인다. 수사 과정에서 군자금이 사실상 데라우치 암살 모의 자금이었다는 걸 포착하고, 끈질긴 취조를 통해 암살 모의의 배후를 밝히는데. 비밀결사 신민회가 처음으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베일에 싸여있던 신민회의 정체는 무엇일까.
▲ 식민지 첫 대규모 재판, 일제의 이중성이 폭로되다
총독 암살 사건으로 구속된 사람만 700여 명, 그중 123명 기소되어 105명이 유죄 판결을 받는다. 이른바 ‘105인 사건’이다. 식민지 사상 단일사건으로 최대 규모다. 일제는 7,000엔을 들여 임시 법정을 짓고 105인 사건의 재판을 연다. 대대적인 재판 이벤트를 통해 일제가 노린 효과는 무엇이었을까.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105인 사건의 첫 공판! 동양의 유일한 문명국을 자처하던 일제의 이중성이 폭로되는데.
/김호경기자 khk010@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