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북미정상회담이 한 달 정도 후에 열릴 것으로 예상 되는 가운데 ‘핵 동결’에 이어 ‘완전한 비핵화 이전 제재 완화’를 시사하는 발언까지 나왔다. 발언의 진원지는 북한이 아닌 미국이다. 그것도 핵 담판을 책임지고 있는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부 장관의 입에서다. 미국이 강력하게 주장했던 ‘선(先) 완전한 비핵화 후(後) 제재 완화’ 원칙은 어느새 사라지고 일정한 핵 능력을 보유한 채 제재에서도 벗어나는 북한의 시나리오가 힘을 얻어가는 모양새다. 국내 정치 위기에 몰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차 북미정상회담이라는 ‘빅 이벤트’로 시선을 돌리기 위해 북한에 ‘통 큰 양보’를 해버릴 수 있다는 우려가 점점 커지고 있다.
폼페이오 장관은 22일(현지시간)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리고 있는 세계경제포럼(WEF)의 참석자들과 화상으로 질의응답을 하면서 “지금은 민간영역이 큰 역할을 하지 못하지만 우리가 비핵화 달성을 향한 상당한(substantial) 조치를 마련하고 올바른 여건을 조성한다면 북한 주민에게 필요한 전기나 북한에 절실한 인프라 구축 등 뭐든 간에 그 배경에서 드러나는 것은 민간 부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완전한 비핵화가 아니라 어느 정도의 비핵화 조치만 있으면 북한이 경제 부문에 외부 투자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폼페이오 장관이 지난해 수차례 반복했던 “완전한 비핵화가 이뤄지면 북한은 경제적으로 엄청난 번영을 누릴 것”이라던 표현에 비하면 상당히 구체적이다. 지난 12일 “북미 대화의 궁극적 목표는 미국민의 안전”이라고 강조한 후 북미 협상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폐기에 그칠 것이라는 우려를 낳고, 19일에는 “북한이 핵·미사일 프로그램 확장 능력 줄이기를 원한다”는 발언으로 핵 동결 가능성을 시사한 데 이어 이날은 제재 완화 이후 북한이 누릴 혜택까지 직접 언급한 것이다.
폼페이오 장관의 이 같은 발언은 연초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신년사 이후 북한이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를 매개로 제재 완화를 계속 주장하고 있는 것과도 묘하게 연결된다. ICBM 폐기와 핵 프로그램 동결 등 정도만 북한이 합의하면 민간 부문이 참여하는 경제 분야의 제재 빗장이 풀릴 수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신문은 23일에도 “최근 남조선 각계에서는 개성공업지구와 금강산관광이 재개되지 못하고 있는 현 실태에 대한 개탄의 목소리들이 울려 나오고 있다”면서 “남조선의 한 대학생단체는 기자회견에서 개성공업지구와 금강산관광재개문제와 관련하여 눈치를 보며 화답하지 못하는 원인은 미국의 대북제재에 있다고 까밝혔다”고 주장했다. 북미 실무협상이 진행 중인 가운데 미국 측에 대한 제재 완화 요구를 전방위에서 높이는 모양새다.
이에 더해 유엔의 대북제재 면제까지 이뤄지면서 2차 북미회담 사전 협상에서 북한의 제재 완화 요구가 이미 상당 수준으로 받아들여진 것 아니냐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산하 대북제재위원회는 18일 4개 인도주의 단체의 대북 물품 반입에 대한 제재면제를 승인했다. 유엔아동기금(UNICEF·유니세프), 유진벨재단, 퍼스트스텝스, 조선의 그리스도인 벗들(CFK) 등이다.
대북 전문가들의 우려는 커지고 있다. 미국 싱크탱크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빅터 차 한국 석좌는 2차 북미정상회담이 1차 때와 마찬가지로 모호한 합의로 북한에 힘만 실어준 채 끝날 것을 우려했다. 차 석좌는 “이번 회담에서는 광범위한 원칙이 아니라 실질적이고 세부적인 것들을 논의해야 한다”며 “트럼프 대통령은 세계 최고의 협상가이지만 잘 준비해야 한다. 이번 협상은 매우 진지하고 세부적인 협상”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또 수미 테리 CSIS 선임연구위원은 “트럼프 대통령은 성공이라고 묘사할 뭔가를 원할 것”이라며 “미국의 정치 상황이 회담에 영향을 줄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있다”고 전했다.
/정영현기자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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