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의 정점으로 꼽히는 양승태(71) 전 대법원장이 구속됐다. 양 전 대법원장은 전·현직 사법부 수장으로는 헌정 사상 처음으로 검찰에 피의자로 소환된 데 이어 구치소에 구속 수감됐다. 한편 박병대(62)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의 두 번째 구속영장은 또 기각됐다.
서울중앙지법 명재권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24일 오전 1시58분께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로 양 전 대법원장의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명 부장판사는 전날 오전 10시30분부터 5시간30분 간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한 뒤 “범죄사실 중 상당 부분 혐의가 소명되고 사안이 중대하다”며 “현재까지의 수사진행 경과와 피의자의 지위 및 중요 관련자들과의 관계 등에 비추어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고 발부 사유를 밝혔다. 영장이 발부된 뒤 서울중앙지검 수사팀(팀장 한동훈 3차장검사)은 곧바로 서울구치소에서 대기 중인 양 전 대법원장을 수감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2011년 9월부터 6년간 대법원장으로 재직하던 때 임종헌(60ㆍ구속기소) 전 법원행정처 차장과 박병대·고영한(64) 전 대법관 등에게 ‘재판거래’ 등 반헌법적 행위를 보고 받고 승인하거나 직접 지시를 내린 혐의를 받고 있다. 양 전 대법원장은 ▲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 민사소송과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댓글사건 ‘재판거래’ ▲ 옛 통합진보당 의원 지위확인 소송 개입 ▲ 헌법재판소 내부정보 불법수집 ▲ 법관 사찰 및 ‘사법부 블랙리스트’ ▲ 공보관실 운영비로 비자금 3억5,000만원 조성 등 사법 행정권 남용 혐의로 제기된 대부분 의혹에 연루됐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이 징용소송 때 일본 전범기업을 대리한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를 직접 만나 심리계획을 누설하는 등 핵심 의혹인 징용소송 ‘재판거래’ 과정을 직접 지휘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사법부 블랙리스트’ 문건에서도 인사 불이익을 줄 판사의 이름 옆에 ‘V’자 표시를 하는 등 상당수 혐의에서 단순히 보고받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개입한 정황을 포착했다. 검찰이 양 전 대법원장에게 ▲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 직무유기 ▲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국고손실 ▲ 위계공무집행방해 ▲ 공무상비밀누설 ▲ 허위공문서작성 및 행사 등 40개가 넘는 개별 범죄 혐의를 적용해 지난 18일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한편 양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장으로 일한 박 전 대법관의 구속영장청구는 불발됐다. 서울중앙지법 허경호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종전 영장청구 기각 후의 수사내용까지 고려하더라도 주요 범죄혐의에 대한 소명이 충분하다고 보기 어렵고, 추가된 피의사실 일부는 범죄 성립 여부에 의문이 있다”며 “현재까지의 수사경과 등에 비추어 구속의 사유 및 필요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박 전 대법관은 2014년 2월부터 2년간 법원행정처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청와대ㆍ외교부와 징용소송 ‘재판거래’에 가담하고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과 옛 통진당 관련 행정소송에 개입한 혐의를 받는다. 재임 기간 법원행정처가 만든 ‘사법부 블랙리스트’에 관여했다는 의심도 받고 있다.
박 전 대법관의 구속영장은 이미 지난달 초 한 차례 기각된 바 있다. 검찰은 박 전 대법관이 고교 후배인 사업가 이모(61)씨의 탈세 혐의 재판 관련 정보를 10여 차례 무단으로 열람한 정황을 확인하고 두 번째 구속영장에 형사사법절차전자화촉진법 위반 혐의를 추가했다. 그러나 박 전 대법관에 대한 두 번째 구속 시도도 실패로 돌아갔다.
검찰은 이번 구속 영장으로 최장 20일 동안 양 전 대법원장의 신병을 확보한 상황이다. 영장에 담긴 범죄 혐의를 보강 수사한 뒤 다음 달 재판에 넘긴다는 게 검찰의 계획이다. 검찰은 이르면 이날부터 양 전 대법원장을 소환한다. 양 전 대법원장은 지난해 10월 구속된 임 전 차장처럼 검찰청사로 이동해 조사를 받는다.
향후 더불어민주당 서영교 의원 등의 ‘재판 청탁’ 의혹과 옛 통진당 소송 배당조작 의혹 등에 대한 수사 결과에 따라 양 전 대법원장의 범죄 혐의가 더 늘어날 수도 있다. /박원희 인턴기자 whatamove@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