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2차 북미정상회담을 이달 말께 열겠다고 예고한 데 이어 협상 테이블 위에 올릴 북미의 교환카드 목록도 먼저 공개적으로 제시했다. 핵물질 및 시설 폐기, 핵·미사일 등의 목록 포괄 신고, 신뢰할 만한 전문가의 현장검증 등 비핵화 조치와 관련된 구체적인 대북 요구 리스트를 확 펼쳤다. 대신 미국이 북한에 줄 수 있는 카드도 내보였다. 종전선언 등 평화체제 논의, 양국 대사관 설치 등을 통해 적대관계 완전 청산, 제재완화와 민간 대북 투자를 통한 북한 경제 발전 적극적 지원 등 북한이 그동안 강력하게 원했던 조치들이다. 이번 2차 북미정상회담에서 가시적 성과를 끌어내겠다는 미국 측의 의지가 그만큼 강력한 것으로 해석된다. 다만 미국의 대북 핵 명세서에 이미 만들어놓은 핵무기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등에 대한 구체적인 요구사항은 담기지 않았다. 한국 입장에서는 안보위협 요소가 계속 남게 되는 셈이다.
미국의 대북 핵 요구 리스트는 그간 조용한 행보를 해온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의 입을 통해 공개됐다. 비건 대표는 1월31일(현지시간) 미 스탠퍼드대 월터 쇼렌스틴 아태연구소가 주최한 북한 관련 강연에서 ‘화끈하게’ 협상에 임하는 자세를 밝혔다. 오는 2월4일 판문점에서 북측 협상 파트너인 김혁철 전 스페인 주재 북한대사와 실무협상을 진행하기에 앞서 먼저 패를 보이면서 기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비건 대표는 이 자리에서 “미국은 북한을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전쟁을 끝낼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또 “북한 정권의 전복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북한이 미국에 대해 갖고 있는 불신의 지점을 먼저 언급하면서 먼저 치고 들어간 것이다. 동시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월 신년사에서 밝혔던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에 대해 화답한 것이기도 했다. CNN방송도 이에 대해 “미국이 한국전쟁을 공식적으로 종식할 의사가 있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북한이 원하는 제재완화와 국교 정상화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비건 대표는 “마지막 핵무기가 북한 땅을 떠나고 제재가 해제되며 대사관에 국기가 내걸리는 완벽한 결말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더해 그는 “우리는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할 방법, 더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궁극적으로 한반도에 합법적 평화를 가져올 방법, 비핵화를 진전시킬 수 있는 방법들을 동시에 찾고 있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정상회담 때 한 이야기도 북한의 경제 발전을 도우며 이 목표를 이루려 노력하겠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비건 대표는 북한을 향해 유화적인 메시지를 거듭 내놓았다. 그는 “우리 쪽에서는 양측에 신뢰를 가져다줄 많은 행동을 실행할 준비가 돼 있다”며 “북한이 비핵화를 하기만 하면 미국은 북한 및 다른 나라들과 함께 대북 투자를 동원하기 위한 최상의 방안을 탐색해 나갈 준비가 돼 있다”고 강조했다.
대신 핵에 대해서는 그간 비핵화 회의론을 야기했던 ‘스몰 딜’ 가능성을 일축했다. 비건 대표는 “비핵화 과정이 최종적으로 되기 전에 우리는 (북한의) 포괄적인 신고를 통해 북한의 대량살상무기(WMD)와 미사일 프로그램의 전체 범위에 대해 완전히 파악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핵심 핵·미사일 시설들에 대한 전문가들의 접근과 모니터링에 대해 북한과 합의에 도달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핵분열성 물질과 무기, 미사일, 발사대 및 다른 WMD 재고에 대한 제거 및 파괴를 담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존 핵물질 및 시설에 대한 폐기와 더불어 핵·미사일 리스트 포괄 신고, 전문가의 현장접근에 합의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에 더해 “미국은 북한과 외교적 과정에서 실패할 경우에 대비한 컨틴전시플랜(비상계획)을 가질 필요가 있으며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비건 대표의 구체적인 언급이 나오자 전문가들은 미국과 북한이 물밑에서 빅딜의 큰그림을 이미 그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김영철 부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김정은 위원장이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에게 약속했던 영변 핵시설 폐기에 대해 보다 확실한 약속을 재확인했을 수 있다”며 “이에 상응해 미국은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같은, 북한이 우려하는 체제 안정을 위한 실질적인 조치를 이뤄내는 데 합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이날 비건 대표는 이미 북한이 완성된 형태로 갖고 있는 핵무기 처리 방식에 대한 요구사항은 언급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판문점 협상 등 정상회담 이전까지 진행될 실무협상에서 이에 대한 처리 방안이 북미 간에 합의되지 않을 경우 결국 2차 북미회담에서 미국이 북한의 기존 핵무기를 용인해주는 셈이 된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정영현기자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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