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에 사는 안승진(38)씨는 지난해 3월의 일을 떠올리면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딸의 숙제를 돕기로 했다가 진땀만 흘린 것. 과제의 주제는 ‘가정의 뿌리, 우리 조상 소개하기’였다. 하지만 그는 ‘순흥 안씨’라는 것 외에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에게 전화해 본인이 몇 대손이고 본관·성씨의 유례가 어떻게 되는지, 또 조상 중에 유명한 분이 누가 있는지를 자세히 듣고서야 딸의 숙제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 경기도 수원에 거주하는 조기찬(34)씨는 얼마 전 종중(宗中)으로부터 휴대폰 문자 한 통을 받았다. ‘인터넷·모바일로도 족보를 확인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신기하다는 생각에 접속해보니 가문의 역사가 한눈에 보였다”며 “내 뿌리를 손쉽게 알 수 있어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한때 집안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족보와 본관·성씨. 명절 때면 차례상을 앞에 두고 집안 어른이 조상이나 본관의 역사 등을 줄줄 쏟아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상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일부 ‘뼈대’ 있는 특별한 가문에서나 찾아볼 정도로 귀한 일이 됐다. 핵가족화, 1인가구·이혼 증가 등이 맞물리면서 가족의 ‘뿌리’에 대한 무관심이 커진 탓이다.
급격한 산업화와 개인주의 흐름 속에 뒤를 돌아보기보다 앞만 보고 달리는 사회 변화가 족보·본관·성씨를 구(舊)시대의 유물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서서히 잊힌 족보·본관·성씨 등에도 조심스럽게 새로운 변화가 나오고 있다. 지금까지 두꺼운 책자만 연상되던 족보가 기술 발달에 따라 ‘디지털’이라는 옷으로 갈아입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전자족보는 종이에 쓰였던 가계도를 인터넷·모바일에 구현한 것이다. 촌수 계산은 물론 가계도, 관련 문건까지 한눈에 손쉽게 볼 수 있다.
본관이나 성씨도 한국 국적을 취득한 귀화자가 늘면서 창성창본(創姓創本)이 한창이다. 지난 2008부터 10년 동안 해마다 6,700명꼴로 시조(始祖)가 늘어나고 있다. 창원 김씨, 영등포 김씨, 태국 태씨 등 출신국이나 거주지 이름을 딴 새로운 성본이 생겨나고 있다. 게다가 소송을 통해 여성이 당당히 종중의 구성원으로 인정되는 등 남성 중심의 씨족관계도 바뀌고 있다. 이혼 증가로 어머니 성이나 재혼한 가정의 새 아버지 성으로 바꾸는 것도 시대 변화에 따른 일이다.
다만 전문가들은 변화의 한가운데 있는 족보·본관·성씨가 우리 고유문화로 제대로 자리매김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다고 지적한다. 우선 필요한 것은 정부의 인식 변화다. 우리 민족의 혼과 얼이 담겼다는 점에서 각종 지원방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자 사용 감소와 호적 전산화가 겹치면서 생긴 잘못된 성씨 본관 입력 등도 고쳐야 할 점으로 꼽힌다. 한자를 헷갈려 정선 전씨(旌善 全氏)를 선선 전씨(旋善 全氏)로 가족관계등록부에 잘못 써넣는 사례 등이다.
김형선 대한성씨본관협회 사무총장(대보사 서울본부장)은 “본관·성씨가 가족관계등록부상 잘못 입력되는 일을 고쳐나가기 위해서는 정부 차원의 신고센터 개설 등이 필요하다”며 “외국인 귀화자의 창성창본이 거주지에 따라 결정되는 데 따라 동일한 본관·성씨가 등장할 수 있다는 문제도 정부가 신경 써야 할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문화지원 측면에서도 역차별이 있다”며 “적산가옥(敵産家屋)은 문화재로 추진되고 있으나 우리 민족의 혼과 얼이 담긴 족보·본관·성씨는 여전히 그렇지 못하다”고 말했다. /안현덕기자 alway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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