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1·2심 판단이 바뀐 데에는 피해자에 대한 ‘성인지(性認知) 감수성’에 대한 깊은 고려가 한몫했다는 분석이다.
성범죄 사건을 심리할 때 피해자의 입장에서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점은 안 전 지사의 1심 재판부도 인정했다.
성범죄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알리고 문제로 삼는 과정에서 ‘2차 피해’를 입을 수 있는 만큼 피해자가 처한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해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판단해야 한다고 인정했다.
1심 재판부는 그러나 사실상 이번 사건의 핵심적이며 유일한 증거인 피해자 김지은씨의 진술에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했다. 범행 전후 김씨가 보인 행동과 주변인에게 전한 메시지 등을 보면 ‘성범죄 피해자’로 보긴 어렵다는 게 1심 판단이었다.
1심 재판부는 안 전 지사가 위력을 행사해 김씨를 범했다는 증거도 부족한 만큼 현행 우리나라의 성폭력범죄 처벌 법제 하에서는 안 전 지사의 행위를 처벌하기 어렵다고 봤다.
설령 김씨의 주장처럼 상급자인 안 전 지사의 성관계 요구에 명시적으로 동의 의사를 표시한 적이 없다 해도 이 같은 ‘비동의 간음죄’에 대한 처벌 규정이 없는 이상 안 전 지사에게 죄를 물을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당시 1심 재판부는 이런 사정을 들며 “부동의 의사를 표명했는데도 성관계에 나아간 경우 처벌하는 ‘노 민스 노’(No Means No)룰이나 상대방의 명시적이고 적극적인 동의 의사가 없는 경우 처벌하는 ‘예스 민스 예스(Yes Means Yes)’룰을 도입할지는 입법 정책적 문제”라며 법 개정의 필요성도 거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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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김씨 진술에 신빙성을 부여하며 현행 법체계하에서도 안 전 지사의 행위를 처벌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재판부는 위력에 의한 추행 등의 인정 여부를 따질 땐 “권세의 종류와 피해자의 연령, 경위, 객관적 상황과 두 사람의 관계, 시대의 성적 도덕관념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결정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피해자 진술이 주요 부분에 있어 일관되고, 경험칙에 비춰 비합리적이거나 진술 자체로 모순되는 부분이 없고, 허위로 진술할 만한 동기가 드러나지 않는 이상 사소한 부분에 일관성이 없다거나, 최초의 단정적인 진술이 이후에 다소 불명확하게 바뀌었다 해도 그 진정성을 함부로 배척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성폭력 피해자의 대처 양상은 피해자의 성정이나 가해자와의 관계 등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며 “법원이 심리할 땐 양성평등의 관점에서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항소심 재판부의 이 같은 판단은 지난해 4월 대법원이 내놓은 판단 기준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 2부는 학생을 성희롱했다는 사유로 해임된 대학교수의 해임을 취소하라고 한 2심 판결을 파기하며 “피해자가 처한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한 상태에서 그 진술이 지닌 증명력을 판단해야지, 함부로 배척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김호경기자 khk010@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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