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잠깐 듣는 것만으로 마음의 불안이 씻겨 내려가는 듯한 아름다운 문장들이 있다. ‘걱정 붙들어 매세요’ ‘걱정일랑 마소’ ‘걱정말랑께’ 같은, 상대방이 홀로 괴로워할 모든 시간을 미루어 짐작하는 사려깊은 마음이 담긴 말들이다. 고교시절 나는 어딘가 예측 불가능한 느낌을 강하게 풍기는, 이해할 수 없는 아이였다. 성적도 들쑥날쑥하고, 감정기복도 롤러코스터 못지않고, 고민이 있어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최하위권과 최상위권을 자유자재로 번갈아 오르내리는 나의 성적을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다. 전교생의 학부모들이 모인 입시설명회에서 수학선생님은 ‘우리 학교에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성적분포를 보이는 학생이 있습니다’라며 최악의 사례로 나를 지목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똑같은 성적표를 마주하고도, 고3때 담임선생님은 우리 어머니께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여울인 걱정할 거 전혀 없어요. 어딜 가든 잘 해낼 거예요.” 불안해하는 학부모를 위로하기 위한 교사의 인간적 배려일수도 있지만, 나로서는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따스한 칭찬이었다.
고3때 나의 성적은 그야말로 누구도 예측불가능한 수직상승과 자유낙하를 반복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속에는 담임선생님의 든든한 칭찬이 피아노의 ‘도’음처럼 안정적으로 가슴속에 자리했다. ‘도레미파솔라시도’로 불안하게 마음이 요동칠 때마다, 나는 다시 ‘도=걱정마세요’라는 기준점을 찾는 느낌이었다. ‘이 아이의 성적은 정말 입시지도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다’라고 선언했던 수학선생님의 말은 독화살처럼 아프게 가슴을 찔렀지만, 똑같은 성적을 보고도 ‘여울인 걱정할 거 전혀 없어요’라고 말씀해주신 담임선생님의 말은 만병통치약처럼 그 모든 상처를 치유해주었다. 이렇듯 마음속에 각인된 말의 힘은 어마어마하다. 때로는 무시무시한 흉기가 되어 폐부를 찌르기도 하고, 때로는 나만을 따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안락의자처럼 언제 어디서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수학선생님은 점수만 보고 내 ‘예측불가능성’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담임선생님은 수치와는 상관없이 ‘나’라는 아이의 보이지 않는 전체성을 꿰뚫어보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그 사람의 ‘부분’만을 알지만, 그 사람의 ‘전체’를 미루어 짐작하는 것은 훌륭한 교육자의 필수 덕목이다.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에서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평범한 학생에게서 ‘위대한 교육자의 싹’을 발견해내는 슬론교수의 날카로운 지성이 반짝인다. 영문과 교수 슬론은 학부생 스토너의 서류와 성적표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자네는 농촌에서 태어났어. 그렇다면 자네 부모님은 농사를 짓고 계실 테지?” “그럼 자네는 학위를 받고 나면 고향으로 돌아갈 건가?” 이 질문을 듣고 스토너는 단호하게 대답한다. “아닙니다, 교수님.” 스토너 자신도 스스로의 확신에 놀란다. 아버지가 어려운 형편을 무릅쓰고 아들을 대학에 보낸 것은 최첨단 농업기술을 배워오길 기대했기 때문인데, 스토너는 아버지 몰래 전공을 영문학으로 바꾸고 싶었던 것이다. 슬론은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농사꾼의 아들 스토너가 문학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그를 따로 불러 진로상담을 해준 것이다. 스토너는 문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지만, 자신조차도 스스로의 재능을 모르고 있었다. 슬론은 스토너를 칭찬하며 이렇게 말한다. “졸업하고 1년 정도 잘 견디면, 분명히 성공적으로 석사과정을 끝낼 수 있겠군. 그후엔 강의를 하면서 박사과정을 밟을 수 있어.” 스토너는 한 번도 구체적으로 상상해 본 적 없던 자신의 막연한 미래를 마치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내는 슬론의 통찰력에 깜짝 놀란다. “자넨 아직도 스스로를 모른단 말인가? 자네는 교육자가 될 재목이야.” 스토너는 너무 놀라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교수님은 도대체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그때 슬론이 미소지으며 말한다. “이건 사랑이야, 스토너.” “자네는 사랑에 빠진 거야.” 스토너는 형언할 수 없는 감동과 충격에 휩싸인다. 스토너의 이 멈출 수 없는 사랑은 영문학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열정과 재능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학생에게, ‘넌 여기에 재능이 있고, 반드시 이걸 해낼 수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 그가 진정한 스승이 아닐까. 학생이 보여주는 ‘부분적 가능성’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전체성’을 그려내는 투시력과 혜안, 그것이야말로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훌륭한 스승의 덕목이 아닐까.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