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로 구속된 양승태(71) 전 대법원장을 11일 재판에 넘기며 사법부 71년 역사상 처음으로 사법부 수장이 직무 관련 범죄 혐의로 기소됐다. 양 전 대법원장은 2017년 9월 퇴임한 지 1년 5개월 만에 형사사건 피고인으로 법의 심판을 받게 됐다.
서울중앙지검 수사팀(팀장 한동훈 3차장검사)은 이날 오후 양 전 대법원장을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공무상비밀누설, 허위공문서작성 및 행사, 직무유기, 위계공무집행방해, 공전자기록위작 및 행사,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국고손실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양 전 대법원장의 공소장에는 각종 재판개입과 ‘사법부 블랙리스트’, 비자금 조성 등 47개 범죄사실이 포함됐다.
또 검찰은 구속영장이 기각된 박병대(62)·고영한(64)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도 불구속 상태로 함께 기소했다. 앞서 두 차례 기소된 바 있는 임종헌(60) 전 법원행정처 차장에는 특정 법관을 사찰하고 인사불이익을 주기 위한 ‘사법부 블랙리스트’ 작성과 실행에 가담한 혐의를 추가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2011년 9월부터 6년간 대법원장으로 일하면서 ‘재판거래’ 등 반헌법적 구상을 보고받고 승인하거나 직접 지시했다는 혐의를 받는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을 비롯한 옛 사법부 수뇌부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전범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옛 통합진보당 의원 지위확인소송,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 관련 행정소송,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댓글사건 형사재판 등에 부당하게 개입했다고 봤다. 또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이 상고법원 도입과 법관 해외파견 등 주력 사업을 추진하고자 청와대와 외교부의 협조를 얻기 위해 이런 범행을 계획하고 실행했다고 파악하고 있다.
아울러 양 전 대법원장은 최고 사법기관 자리를 놓고 헌법재판소와 위상 경쟁을 벌이며 우위를 점하기 위해 이 같은 범행을 저질렀다고 봤다. 그는 한정위헌 여부를 판단해달라는 서울남부지법의 위헌법률심판 제청 결정을 취소하고 헌법재판소로 파견 간 판사로부터 헌재 평의내용 등 불법 수집한 내부기밀을 보고받은 혐의를 받는다. 또 박한철 당시 헌재소장을 비난하는 내용의 법률신문 기사를 대필하도록 법원행정처 심의관에게 지시한 혐의도 추가됐다.
검찰은 법원행정처가 사법행정이나 특정 판결에 비판적 의견을 낸 판사 명단을 작성해 문책성 인사를 검토·실행했다는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 역시 양 전 대법원장이 주도했다고 판단하고 있다. 또 양 전 대법원장의 공소장에는 문모 전 부산고법 판사 비위 의혹 축소·은폐, ‘정운호 게이트’ 당시 수사정보 불법수집, 대한변호사협회 압박, 공보관실 운영비 예산 3억5,000만원 비자금 조성 등 혐의도 포함됐다.
박 전 대법관은 각종 재판개입과 헌재 내부기밀 불법수집, 사법부 블랙리스트, 비자금 조성 등 33개 혐의로 재판을 받을 예정이다. 고 전 대법관은 후임 법원행정처장을 맡아 사법부 블랙리스트와 영장재판 개입, 판사 비위 은폐 등 18개 범죄사실에 공모한 혐의를 받는다. 여기에 그가 다른 피고인들과 별개로 고교 후배의 청탁을 받고 형사사법정보시스템을 19차례나 무단 열람해 사건 진행상황 등을 알아봐준 혐의(형사사법절차전자화촉진법 위반)가 추가됐다.
양 전 대법원장은 사실상 모든 공소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어 치열한 법정 공방이 벌어질 것으로 예측된다. 양 전 대법원장은 구속 전 소환조사 때부터 “실무진이 알아서 한 일”이라거나 “직권남용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며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의혹의 정점에 있는 양 전 대법원장이 기소되면서 지난해 6월부터 8개월간 서울중앙지검 특수부가 수사력을 집중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수사가 사실상 마무리됐다. 검찰은 의혹에 연루된 전·현직 판사 100여명 가운데 나머지는 가담 정도 등을 고려해 이달 안에 기소 여부를 결정하는 한편 대법원에 비위 사실을 통보할 방침이다. 또 ‘재판거래’ 상대방인 박근혜 전 대통령과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 정부 측 인사, 자신이나 지인의 민·형사 재판을 두고 법원행정처에 청탁한 전·현직 국회의원들의 경우 직권남용 등 혐의 적용이 가능한지 법리검토를 거쳐 사법적으로 처리할 계획이다.
/이다원 인턴기자 dwlee618@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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