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등 5학년 기훈(가명)과 정우(가명)는 공개적으로 반 친구를 비난하고 놀리기를 좋아했다. 못생겼다거나 말이 느리다며 친구들을 수시로 비난하면 나머지 아이들이 따라 웃고 함께 놀렸다. 그러나 막상 익명 설문조사가 시작되자 반 아이들은 이 둘을 ‘함께 놀기 싫은 친구’로 뽑았다. 충격을 받은 기훈은 “욕을 하면 잘나가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친구들이 다 나를 싫어하고 있었다. 미움 받을까 두렵다”며 고개를 떨궜다.
학교폭력은 피해자 한 명에게만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 교실 전체를 불안에 빠뜨리고 평화를 깬다. 아무도 자신을 지켜줄 수 없다고 느낄 때 학생들은 폭력의 피해자가 되지 않으려고 본능적으로 가해자가 되거나 가해자에게 가담한다. 치열한 서열투쟁을 벌이느라 서로 할퀴고 멍들면서도 학생들은 누군가 전쟁을 멈춰주기를 바란다. 너무 늦어지면 학생들이 무력감에 휩싸일 수 있다. 교실 평화에 금이 갈 때 곧바로 ‘선제 조치’해야 하는 이유다.
최근 서울경제신문과 만난 학계와 교사들은 가해자 한두 명을 꼭 집어 주홍글씨를 남기는 현행 제도 대신 교실 안 평화를 다시 구축하는 ‘평화 교육’이 학교폭력을 예방하는 데 절실하다고 입을 모았다. 강균석 따돌림사회연구모임 교사는 “처음 학폭을 맞닥뜨렸을 때는 막막했지만 학급 목표를 단순 중재가 아닌 ‘평화 구축’에 맞췄을 때 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며 “교사가 학급 운영 방식과 학급 흐름을 수시로 공유하고 개입할 때 아이들이 달라졌다”고 했다. 고은우 교사도 “아이들이 또래 사이에서 치열하게 인정받으려 하고 권력다툼을 벌이지만 또 그만큼 전쟁상태를 끝내고 싶어한다”며 “소속감과 평화를 간절히 바라는 속마음을 읽어주고 전면에 꺼내주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현행 평화 교육은 교사 대상 연수에 한해 한정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연 2회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학교폭력 예방교육시간이 있지만 구체적인 운영지침이나 안내가 없어 ‘영화시청시간’으로 전락하거나 흐지부지되기 일쑤다. 교사들은 교실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로운 각개전투를 벌이는 형편이다. 다행히 올해부터는 교육부가 국가 주도 학폭예방 프로그램 ‘어울림’을 개편해 모든 학교로 확산하기로 했다. 정규교육과정 안에 수시로 체험형 수업을 넣어 학생들의 공감 역량을 높이겠다는 전략이다.
당국의 의지가 강하지만 평화교육이 실제로 교실에 뿌리내리려면 일선 교사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자신이 맡은 교실의 특징과 학생들의 기질을 잘 아는 교사가 ‘맞춤형’ 교육을 할 때 회복 효과가 높고 학생들의 진솔한 마음을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현행 학교폭력 예방법은 교사들이 학폭을 인지하자마자 학교 자치위에 신고하도록 의무를 부과해 실질적인 갈등 참여를 차단하고 있다. 교사들은 갈등을 교육적으로 봉합하기 위해서라도 교사에게 중재권한을 주도록 법을 개정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폭력을 방관하는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해결 과정에 끌어들일 방안도 필요하다. 지난해 5학년 지훈(가명)이는 반 아이들이 쉬는 시간마다 교사를 주제로 욕을 하자 이를 교사에게 알렸다. 교사는 반 학생 모두가 보는 앞에서 욕설과 험담이 왜 파괴적인지, 누가 왜 이것을 그만두어야 하는지 설명했고 가해 학생의 사과를 받아냈다. 담당 교사는 “교실의 평화를 위해 먼저 용기를 낸 지훈이에게 반 아이들이 고맙다고 말하는 것을 봤다”며 “방관자 한 명 한 명이 폭력에 무뎌지지 않고 스스로 평화를 만들어나갈 때 그 경험이 개인과 집단 모두에게 큰 각인효과를 줬다”고 했다.
실제로 김동희 성신여대 간호학과 교수팀이 지난 2017년 발표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학폭 현장 방관자는 괴롭힘에 가담하거나 이를 무시하는 학생, 피해자를 옹호하는 학생 3개 그룹으로 나눌 수 있었다. 남학생일수록, 하급생일수록, 학업성취도가 낮을수록, 교사와의 관계가 나쁠수록 괴롭힘에 가담하는 횟수가 많았고 타인의 아픔에 무감각한 학생도 괴롭힘을 무시하는 횟수가 많았다. 연구팀은 “방관자들이야말로 폭력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당사자”라며 “이들의 성향과 동기부여를 고려한 예방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신다은기자 down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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