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사법부 시절 법원행정처가 전국 각급 법원장들에게서 ‘판사 블랙리스트’ 기초자료를 수집한 것으로 검찰 수사 결과 드러났다.
인사권을 핵심으로 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제왕적 권한 키우기’에 일선 법원장들까지 동원된 셈이다. 양 전 대법원장은 재임 시절 폐지 수순을 밟던 고법 부장판사 승진제도를 부활시키는 등 자신의 인사권을 지속적으로 확대했다.
12일 양 전 대법원장의 공소장에 따르면 양승태 사법부 시절 법원장들은 근무평정표 이외에 소속 판사들이 사법행정을 비판하거나 사법행정에 부담을 준 내용 등을 정리한 ‘인사관리 상황보고’를 2013년부터 해마다 작성했다.
법원장들은 대법원장 신년 인사차 대법원에 방문할 때 이 보고서를 ‘인비’(人秘·인사비밀)라고 적은 봉투에 담아 법원행정처장에게 직접 전달했다. 이 보고서는 양승태 사법부 시절 법원행처에서 매년 작성된 ‘물의야기 법관 인사조치 검토’ 문건, 즉 ‘사법부 블랙리스트’의 기초자료가 됐다.
‘물의야기 법관’은 원래 음주운전이나 성추행 등 비위를 저지른 판사를 뜻했다. 그러나 양 전 대법원장은 취임 직후 2012년 정기인사 관련 보고를 받으면서 “사법행정 방침과 정책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법관, 대법원 입장과 배치되는 하급심 판결을 선고하거나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등 사법행정에 부담을 준 법관도 물의야기 법관으로 분류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조사됐다.
양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당시 법원행정처장, 임종헌 전 차장은 정기인사 때 ‘물의야기 법관 현황’ 보고서와 언론·국정감사에서 문제가 된 사안, 법원장들에게서 보고받은 ‘인사관리 상황보고’ 등을 종합해 판사 블랙리스트 문건을 작성하도록 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이 문건에 담긴 인사조치 방안에 수기로 ‘V’자 표시를 하거나 구두로 부임지를 정했다.
완성된 판사 블랙리스트는 작성 때와는 반대 방향, 즉 법원행정처에서 각급 법원으로도 건네져 개별 법관의 인사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파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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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행정처는 사법행정을 비판하거나 부담을 주는 행위 등 해당 판사에게 부정적인 인사 관련 정보를 ‘각급법원 법관 참고사항’이라는 문건으로 정리해 각급 법원장들에게 전달했다. 법원장의 부정적 근무평정을 유도할 뿐 아니라 형사재판 등 특정 업무에 부적절하다고 통지하기도 했다.
물의야기 법관으로 한번 분류되면 대법원 재판연구관이나 해외연수 등 선발성 인사에서 원칙적으로 배제됐다. 대법원 정책에 반대했다가 성추행이나 음주운전 등 ‘진짜’ 물의를 일으킨 법관보다 더 가혹한 인사 불이익을 받은 경우도 있는 것으로 검찰은 파악했다.
사법행정을 비판하거나 ‘튀는 판결’을 내리지 않았는데도 황당한 이유로 물의야기 법관이 된 판사들도 있었다.
법원행정처는 2016년 서울중앙지법 단독판사회의 간사로 활동한 A판사를 물의야기 법관으로 분류하면서 ‘대학교 학생회장 경력’을 들었다. 성향상 사법행정에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부담을 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B판사는 가족해체 예방 차원에서 혼인신고 때 양쪽이 출석해 의무적으로 부모교육을 받도록 하는 가족관계등록법 개정 운동을 추진했다가 물의야기 법관에 올랐다. 법원행정처 심의관 등과 협의를 거쳤지만 소속 법원장에게는 “법원행정처 입장과 달리 독자적으로 법률 개정 운동을 추진했다”는 허위 정보가 전달됐다.
법원행정처는 가족관계등록법 개정안 논의차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참석하려는 B판사를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는 ‘뒤끝’도 보였다. B판사는 법사위 소위원장과 법원장의 허락을 받고 발언을 위해 국회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고영한 당시 법원행정처장과 임종헌 당시 차장은 회의에 참석해 B판사의 불출석 사유를 허위로 설명한 것으로 조사됐다.
/김호경기자 khk010@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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