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하원을 장악한 민주당이 본격적으로 기업 활동을 옥죄기 시작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독주를 막으려는 야권 대권주자들이 반독점당국에 스프린트와 T모바일 간 인수합병(M&A) 반대를 압박하고 나서는 등 표심을 의식해 기업 규제를 강화하려는 민주당의 행보는 내년 대통령선거 때까지 이어지며 미국 경제에 또 다른 정치 리스크를 초래할 것으로 우려된다.
미 정치전문 매체 더힐은 민주당 상원의원 8명과 무소속의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 의원이 12일(현지시간) 사법부와 연방통신위원회(FCC)에 T모바일과 스프린트 간 M&A에 반대하는 서한을 발송했다고 보도했다. 서한 작성에는 민주당의 엘리자베스 워런, 코리 부커, 에이미 클로버샤 의원 등 대권주자들이 다수 참여했다. 이들은 “두 기업 간 합병으로 통신비가 올라가고 기업 경쟁을 저해할 수 있다”면서 “당사 주장대로 합병이 5세대(5G) 이동통신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라고 합병 반대를 주장했다.
이동통신 업계 3위인 T모바일(점유율 17.9%, 지난해 상반기 기준)과 4위 스프린트(13.5%) 간 합병은 이동통신 시장의 숙원이었다. 현재 버라이즌과 AT&T가 압도적 1~2위를 차지하고 있는 시장에 합병사가 가세할 경우 각각 30%대의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는 3사 경쟁구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사의 합병작업은 지난 5년간 순탄치 않은 길을 걸어왔다. 재일교포 3세 기업인 손정의 회장이 이끄는 소프트뱅크가 2012년 스프린트를 인수한 뒤 2014년에 추진한 T모바일과의 1차 합병 시도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반대로 무산됐다. 2017년 양사가 다시 의기투합했지만 합병사의 대주주 자리를 어디에서 차지할지를 놓고 이견이 커 또 불발됐다. 그로부터 5개월 뒤 T모바일 대주주인 도이치텔레콤이 합병법인 지분 42%, 스프린트 대주주인 소프트뱅크가 27%를 갖기로 합의하면서 양측은 3수 끝에 265억달러(약 29조7,000억원)의 초대형 협상을 타결했다. 지난해 말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CFIUS)를 통과하면서 합병작업은 올해 마지막 관문인 반독점당국의 승인 단계만 남겨둔 상태다.
양사는 올 상반기 합병을 마무리 짓기 위해 최대한 정치권을 자극하지 않으려 애써왔다. 최근 경쟁사인 AT&T·애플 등 100개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이 ‘드리머(불법 입국자들의 자녀)’의 신변을 보호하라며 의회에 단체 서한을 보낼 때도 T모바일과 스프린트는 명단에서 빠졌다. 존 레저 T모바일 CEO는 이번주 의회 청문회를 앞두고 “우리는 5G에 화웨이나 ZTE(중싱통신) 장비를 쓰지 않는다”며 중국의 안보 위협 이슈에서도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민주당의 강력한 반대로 이러한 노력은 다시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다. 미 의회는 M&A 승인의 최종 권한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최근 양사 합병에 불리한 지적들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정치권의 압박이 반대여론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 측은 지난해에도 손 회장이 화웨이와 긴밀한 관계라며 합병 반대를 주장했다. 최근에는 워싱턴포스트(WP)가 양사의 합병 논의 과정에서 레저 CEO가 ‘트럼프 호텔’에 머문 것이 부적절한 행위였다고 지적하며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트럼프 정권의 기업규제 완화에 제동을 걸려는 민주당의 행보는 지난해 중간선거부터 이미 예고됐다.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는 이달 초 샌더스 의원과 뉴욕타임스(NYT) 기고문을 통해 임금 인상, 복지 증진에 힘쓴 기업에만 자사주 매입을 허용하는 법을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하원 금융서비스위원장인 민주당의 맥신 워터스 의원과 워런 의원은 최근 금융사인 BB&T와 선트러스트가 연내 합병을 발표하자 “합병 승인은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감시 기능에 의혹을 일으킬 것”이라며 제롬 파월 의장을 압박하기도 했다.
정치권이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기업을 볼모로 삼으면서 정치 리스크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폴 볼커 전 연준 의장은 “미국은 세계 정상의 지위를 잃고 있다. 지난 4~5년간의 정치상황 때문에 이러한 움직임이 더 빨라지고 있다”면서 정치가 경제의 최대 리스크로 부상했다고 지적했다.
/김창영기자 kcy@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