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전투기(KF-X)가 시제기 제작에 들어갔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은 지난 14일 경남 사천 본사에서 KF-X 시제기의 ‘벌크헤드(bulkhead)’ 가공에 착수하는 기념식을 가졌다. KF-X 시제기 제작 착수가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이미 몇몇 부품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제작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졌다. KAI의 벌크헤드 가공 기념행사는 KF-X가 갖은 난관과 억측 속에서도 순항하고 있음을 웅변하는 것이다. KAI가 부분적으로 공개한 도면을 보면 애초 계획보다 기체 크기가 커지고 성능도 예상 이상으로 평가된다. 특히 진화적 개발을 통해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기체라는 점이 확인됐다.
◇‘벌크헤드’란=벌크헤드는 모든 수송수단의 부품이다. 자동차와 배에도 벌크헤드가 있다. 다만 용도는 다르다. 자동차에서는 운전대와 엔진룸의 칸막이벽을 뜻하며 미국에서는 ‘파이어 월(fire wall)’로도 불린다. 배에서는 수직 칸막이를 벌크헤드라고 부른다. 공사장에서의 안전용 대형 수직 칸막이도 벌크헤드다. 전투기에서의 벌크헤드는 고속비행 시 발생하는 압력으로부터 항공기의 변형을 방지하기 위한 뼈대 역할을 하는 주요 구조물이다. 동체 중앙의 거대한 기본 뼈대 역시 벌크헤드에 포함되지만 이번에 제작하기 시작한 부품은 기수 부분과 조종석 아랫부분이다.
◇부품 제작 지난해 말부터 이미 시작=주목할 대목은 KAI의 벌크헤드 제작 착수 이전인 지난해 말부터 일부 부품이 제작에 들어갔다는 점이다. 특히 조종석은 실물 모형(mock-up)이 이미 제작돼 공군의 테스트 조종사들이 탑승해 계기판의 구조와 조종간 팔 길이, 각종 장비의 적정 위치와 크기 등을 조정하는 단계다. 설계와 제작이 거의 동시에 이뤄질 만큼 KF-X가 속도를 내고 있다는 방증이다. 방위사업청의 관계자는 “막판에 여유를 갖고 점검하기 위해 개발 속도를 높이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무장은 다소 지연되고 있다. 방사청 관계자는 “무장 개발도 일정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고비 넘었다’ 개발 의지 재천명=부품은 물론 조종석 목업까지 제작돼 상세 설계에 활용되는 마당에 KAI가 벌크헤드 가공을 공개한 이유는 두 가지로 풀이된다. 첫째, 인도네시아의 철수설을 비롯해 사업의 순항 여부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함이다. 인도네시아의 투자분 송금이 늦어지며 사업 자체가 지연되고 KF-X의 가격도 필연적으로 올라갈 것이라는 일각의 우려를 떨치고 국민적 지지와 관심속에 사업을 진행하자는 의지가 담겨 있다. KAI 관계자는 “인도네시아가 개발분담금 전액을 완납한 것은 아니지만 어려운 국내 사정에도 1,320억원을 송금했다는 점은 끝까지 공동개발사업을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한 것”이라고 말했다.
◇성능, 예상 웃돌 듯=사업을 주관하는 방위사업청과 연구를 책임지는 국방과학연구소(ADD), 연구에 참여하고 실물을 제작하는 KAI는 성능에 대해 입을 아끼는 분위기다. 특히 성능이 기대 이상이라는 점에 대해 구체적인 답변을 꺼리고 있다. 자칫 견제받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그러나 14일 공개된 영상과 사진으로 볼 때 KF-X는 그동안 알려졌던 제원 이상의 성능을 갖출 것으로 전망된다. 일단 크기가 커졌다. F-35보다 확연하게 크고 외형도 날렵하다. 길이 17m를 웃돌아 추가 개량에도 여유가 있는 편이다.
기체 내부의 공간이 예상보다 크다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애초 16m로 알려졌던 동체 길이가 17m 이상으로 늘어났다. 이착륙 바퀴(랜딩기어) 수납부의 상세 설계안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공개된 영상으로 미뤄볼 때 무장을 내부에 적재할 수 있는 공간이 충분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오는 2021년 4월 출고될 시제기와 1차 양산물량(Blocl 1)에서는 장거리 공대공 미사일 4발이 중앙동체 아래 반매립 형태로 장착될 예정이다. 정광선 KF-X 개발사업단장은 “군의 요구에 따라 공간은 유지했으나 내부 무장창은 지금 단계에서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군은 블록 2·3으로 진화적 개발 단계에서 완전 매립형으로 성능을 개량해나갈 계획이다.
◇밝힐 수 없는 첨단 성능도 있다=적어도 KF-X에서는 지난해 4월 경북 칠곡 유학산에서의 F-15K 추락 같은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다. 첨단 자동지상충돌 회피 장치는 물론 유체역학에 따라 움직이는 항공기의 특성을 극복할 수 있는 기능까지 탑재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양산형 항공기로는 F-35 라이트닝 전투기 다음으로 적용될 기술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군이 당초 요구한 성능은 F-16 전투기를 약간 웃도는 수준이지만 진화적 개발의 진행 여부에 따라 더욱 발전할 수 있는 여지가 크다는 점은 분명하다.
◇‘개발만 하고 양산은 보류?’…‘절대 없다’=방사청 관계자는 일각에서 제기되는 개발은 하되 양산은 보류하는 방안에 대해 ‘일고의 가치도 없는 얘기’라고 잘라 말했다. 일본이나 이스라엘처럼 기술만 축적하고 양산기 제작을 포기한 채 외국제 전투기 구매로 돌린다는 구상은 인도네시아 등 대외제휴선은 물론 국내 기술축적과 인력 채용 차원에서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전투비행단장을 지낸 한 공군 예비역 장성은 “전투기 구매 예산과 후속 군수지원을 감안하면 국산 전투기 생산은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이라고 말했다.
그는 “F-22, F-35 이후에 등장할 6세대 전투기의 경우 대당 가격이 3억달러 이상으로 예상된다”며 “한국의 재정 여건에 비춰 도입이 아예 불가능하다면 우리 수준에 맞는 국산 전투기를 개량해나가는 게 최선”이라고 설명했다. 전투기 수명주기와 각종 부품 수급 면에서도 국산 전투기 외에 다른 대안을 찾기가 어렵다. 한번 도입하면 최소한 30년 이상 사용하는 전투기는 폐기할 때까지 들어가는 부품과 수명연장 비용, 즉 수명주기비용(LCC)이 도입 비용의 3~4배에 이른다. 더욱이 첨단전투기일수록 부품을 통째로 교체하는 경우가 많고 특수도료까지 필요해 유지비는 더욱 비싸기 마련이다.
한국 공군이 아직도 현역으로 운용하는 F-5E/F 전투기의 초도비행이 1972년, F-4 전투기가 1965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KF-X 역시 50년 이상 운용될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한국 공군에서는 상대적으로 신형인 KF-16·F-15K 전투기도 앞으로 20~30년 뒤에는 도태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를 대체할 기체를 외국에서 찾기에는 재정 부담이 막대하다. 도입가는 물론 운용 유지조차 어려운 외국산 전투기보다 국산 전투기 개발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가격, 7,000만달러 넘지 않는다’=해외 협력 부진과 기술이전에 대한 미국의 비협조로 개발 비용이 상승해 KF-X의 대당 가격도 뛸 수밖에 없는 반면 미국제 F-35 전투기는 대량생산으로 가격이 내려갈 예정이어서 외국산 전투기 도입이 오히려 경제적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강력한 반론이 나왔다. 방사청 관계자는 “난점이라고 여겼던 국제 협력이 만족할 수는 없어도 다시금 정상궤도로 돌아왔고 해외 기술도입 비용도 생각보다 크지 않다”며 “어떤 이유로든 KF-X 블록 1의 가격이 7,000만달러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확언했다.
◇10월 실물 크기 모형 등장=당초 예상했던 가격이 유지되고 개발이 순조로울 경우 KF-X는 비싼 전투기를 구매할 수 없는 국가들에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생산과 해외 영업을 담당하는 KAI는 상세설계가 거의 끝날 올 9월을 전후해 실물 크기의 모형을 제작, 10월15일 서울공항에서 열릴 서울 국제항공우주 및 방위산업전시회(ADEX)에서 공개할 예정이다. 소형 축소 모형과 컴퓨터 그래픽으로만 봐온 KF-X가 실물 크기로 다가오는 것이다. 국민과의 만남은 물론 대외 판매전도 사실상 이때부터 시작되는 셈이다. 정부는 2021년 시제기 6대(1대는 인도네시아 공군용)를 제작해 2026년부터 전력화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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