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1년 충북 청원(청주)에서 출생한 선생은 1882년 동학에 입문, 1894년 호서지방 중심의 북접(北接) 사령관인 통령(統領)에 임명되어 남접의 전봉준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의 기수로서 활약했다.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민족 계몽 운동에 관심을 쏟았다.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를 비롯해 수십 개의 남녀학교를 인수 또는 신설했다. 선생은 1919년 1월 도쿄 유학생의 2·8독립선언계획, 신한청년당 및 기독교계의 독립운동 계획을 듣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심했다.
권동진, 오세창, 최린과 3·1독립운동의 골간이 된 대중화, 비폭력화, 일원화 등 3대 원칙에 합의하고 각 교계의 중심 인사들을 규합했다. 이윽고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와 청원서 등이 완성되자 선생은 직접 이를 검토했다. 천도교의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가 인쇄됐다.
1919년 2월 27일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독립선언서에 날인했고, 2월 28일 자신의 집에 천도교, 기독교, 불교의 민족대표를 불러 독립선언서의 발표 장소를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변경했다. 거사일인 3월 1일 선생은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들과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선언식을 마친 후 일경에 연락해 자진 체포됐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뇌출혈로 가출옥했으나 1922년 5월 19일 생을 마감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됐다.
/권홍우기자 hongw@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