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는 크지 않은 공공기관의 1급 실장이었다. 입사 후 초고속승진에 최고 연봉 기록도 갖고 있었다. 위아래 인간관계도 좋았다. 문제는 정부의 초대형 용역사업이었다.
평소 이 공공기관은 수억원 규모의 정부 용역사업을 수행하곤 했다. 하지만 정부 감독부처에서 이 기관에 1,000억원대 용역사업을 맡으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성공한다면 기관이 몇 단계는 점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기관장은 이 사업을 K에게 맡겼다. K 역시 의욕적으로 사업검토를 시작했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이 기관에서 할 수 있는 사업이 아니었다. 인력도, 기술도 무리였다. 자칫 이 사업을 계속 추진하다가는 기관에 큰 위험이 될 수 있다는 판단도 들었다. 경영진에 이 같은 사실을 보고했다. 하지만 경영진은 위험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 추진’을 밀어붙였다. 아무리 얘기해도 사업진행을 강요했다. 사내에서 역시 무리한 사업추진이라는 소문이 확산되면서 추진단장인 K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도저히 이 같은 상황을 견딜 수 없어 K는 사표를 냈다. 하지만 회사는 사표를 반려했다. 얼마후 다시 사표를 냈지만 또다시 돌아왔다. 수차례 사표까지 반려되자 그는 이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다른 길이 없다고 느꼈다. 얼마 뒤 그는 자신의 집에서 자살했다(‘업무상 자살’ 산재인정 사례). 40~50대 중년남성들의 자살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자살예방운동 단체인 라이프호프의 조성돈 대표(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보통 자살 하면 10대 청소년의 경우를 많이 걱정하지만 40~50대 남성 자살자 수는 이들보다 10배 이상 많다”고 말했다. 지난 2017년 연령별 성별 자살자 수 통계를 보면 50대 남자가 2,002명으로 가장 많았다. 다음이 40대 남자로 1,692명, 이어 60대 남자 1,262명, 30대 남자 1,226명 순이다. 10대 남성 자살자 수는 163명이다. 보통 자살자 수는 남성이 여성보다 연령별로 2~3.5배 정도 많다. 40~50대 남성 자살자 3,694명 중 배우자가 있는 경우는 1,755명, 사별 66명, 이혼 924명으로 결혼 경험이 있는 사람이 전체의 74.5%를 차지한다. 김인아 한양대 의대 교수는 “보통 자살을 생각하는 근로자들은 완벽주의적이고 업무성과가 좋고 내성적인 성향”이라고 말했다. 조성돈 대표는 “이들은 우리 사회의 중추이자 가장이라는 점에서 주변에 미치는 충격이 더욱 크다”며 “돈 못 버는 가장도 가정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분위기가 돼야 중장년 남성들의 극단적인 선택이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탐사기획팀=안의식선임기자 김상용기자 miracl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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